찢어지는 아버지 마음
내가 남편이 벌인 그 간악하고 극악무도한 일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급성으로 '갑상선 기능 항진증'과 '부정맥'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사실은 한동안 내가 나 자신을 책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혹시 무엇을 잘못해서 남편이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내가 부족했던 부분이 너무 많았나?
아픈 아이를 데리고 힘든 시절에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고 애쓰며 노력했던 모습이 너무 답답하고 그악스럽게만 느껴졌을까?
별의별 생각을 다하며 내가 조금만 더 노력? 했더라면 우리에게 불행했던 시간이 찾아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멈추기가 어려웠다.
쉽게 결론이 나지 않을 이 문제에 대해선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생각하고 또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곧 한 가지 생각에 막혀 버렸다. 세상의 모든 부부가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긴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해결한다면 어떤 부부가 상대를 믿고 의지하고 살아갈 수가 있겠는가? 이건 내 잘잘못을 떠나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외도는 상대방의 영혼을 죽이는 명백한 영혼 살인이다.
나는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했었다.(그래서 그 일이 더 힘들고 용납하기 어려웠나 봅니다. 이혼은 하지 않았지만 남편을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나름대로 잘 맞추며 살아갈 수 있었을 뻔했는데.
용서를 하지 못한 건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나 받지 못한 사람이나 다 함께 불행해지는 일이 돼버린 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내 이상형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는데 뭘 보고 그렇게 '훅' 빠졌는지는 나도 미스터리였지만 나중에 영업을 할 때 보면 나오는 스킬 중에 자주 눈을 맞추고 웃어주고 다정하게 대해주며 상대의 필요를 간파하는 핵심 능력에 당한 게 아닌가 두고두고 내 나이 어림과 어리석음을 한탄했었다.
내가 은행을 더도 말고 1년~2년만 더 다녔다면 절대 넘어가지 않았을 그런 허접한 잡 기술에.ㅉ ㅉ
약속했던 친정식구들의 집들이 전 날엔 밤새 불면증으로 한숨도 못 잤지만 아프다는 걸 어떻게든 감춰보고 싶은 마음에 머리도 새롭게 만지고 화장에도 신경을 썼다.
옷도 마른 몸이 드러나지 않도록 신경 써서 골라 입고서 과일과 차를 준비해 놓고 부모님과 오빠, 동생네를 맞이했다.
일부러 더 큰 목소리로 더 환하게 웃고, 깔깔 거리며 큰소리로 얘기하고, 행복한 척, 화목한 척, 아무 일도 없는 척을 하느라 안 그래도 고단하고 힘든 몸에 식은땀이 끊이질 않았다.
예전 살던 집보다 평수가 줄은 집을 보신 후에 식사를 하시는 내내 별말씀이 없으시던 아버지는 가실 무렵이 되었을 때 나를 조용히 부르셔서는 두 달 사이에 몰라볼 정도로 형편없이 말랐다는 말씀을 하시다 끝내 울먹 거리셨다.
"ㅇㅇ아. 이사가 많이 힘들었니?
니 꼴이 너무 많이 틀어졌다.
힘든 거 있음 뭐든지 아빠한테 얘기해. 알았지? 아빠가 발이 안 떨어진다. 아빠가 이거 주고 가는 걸로 먹고 싶은 거 사 먹고 살 좀 쪄야겠다. 필요하면 얼마든지 더 얘기하고.... 아빠가 다시 올게. 아니 네가 와라. 알겠지?"
아버진 나를 꼭 안으시며 한참을 추스르시곤 내게 봉투를 건네주셨다
결혼이고 뭐고 그냥 그 자리에서 아버지에게 매달려 다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눌러 참아야 했다.
눈물이 흐르다 못해 터져 나올 것 같은걸 입술이 피가 나도록 깨물어 그 시간을 참아 넘겼다.
어떻게 견디고 버틴 몇 개월의 시간이었던가.
이혼을 할 생각이었다면 벌써 진작에 털어놓고 끝을 내 버렸을 거였다.
저 인간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상관할 거 없이 나는 내 살 궁리만 하면 됐을 테지만 이미 이혼을 안 하겠다 생각한 이상 참고 견뎌야 했다.
아버지가 주시고 간 봉투엔 200만 원의 현금이 들어 있었다.
그걸로 딸을 낳고 산후조리 후에 몸이 많이 안 좋을 때 아기를 봐주시며 집안일을 돌봐주시던 이모님께 연락을 드려 한동안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요긴하게 쓰였는지...
그렇게 돌아가시고 다음날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ㅇㅇ아. 몸 좀 어떠니?
어제 엄마가 보니까 너 몸이 많이 안 좋은 거 같은데 엄마하고 한의원 가게 지니 유치원 보내고 이 쪽으로 건너와.
그리고 아버지가 당장 이 쪽으로 다시 집 옮기라고 하셔서 부동산에 얘기했으니까 너네도 주인한테 얘기해서 옮긴다고 하고. 큰 애네도 분가시키고 막내네도 가까운 데로 데리고 오신다고 해서 바로 옆 두동 사이로 알아보고 있어. 암튼 서둘려서 준비하고 와."
"엄마. 우리 여기로 이제 이사한 지 두 달 조금 넘었는데.... 그리고 나 한의원 안 가도 돼.
지금 부정맥 하고 갑상선 검사해서 결과 나왔어.
부정맥이 심하고 불면증이랑 수전증 땀 많이 흘리고 탈모 심하고... 몸무게 많이 빠졌어요.
거의... 24~25kg쯤? 다른 사람들은 많이 먹는 다는데 저는 입맛이 없어요. 그냥 계속 눕고 싶고요... 병원은 그냥 여기서 다녀도 돼요.
그리고 다시 나가려면 우리 가진 걸로 부족한데... 우린 안될 거 같아. 모은 돈이 그만큼은 안돼.
지니 학교도 생각 안 하는 건 아닌데 여기서는 사립 초교 보내면 돼요.
우선 제가 너무 머리 복잡하고 정신이 없어요. 이서방 이랑 얘기해 보고 어쩔지 말씀드릴게. 네. 다음 병원 갈 때 말씀드릴게."
순식간에 너무 여러 가지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려 하고 있었다.
남편에게 얘기했더니 남편은 다시 강남 쪽으로 나가는 것은 대 환영 이라며 시 아버지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1500만 원이라는 거금을 만들어 냈다.
다른 사람들에겐 짠돌이고 자신에게는 관대하신 시아버지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그게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뭐 굳이 알고 싶지도 않지만.
어머니 돌아가실 때 아주버님과 아버님께 너무 호되게 당해 학을 떼는 경험을 하게 되지만 하여간 이때만큼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모자란 나머지 비용은 아버지께서 다 부담해 주셔서 다시 서초구 ○○동 에 한 아파트 한 동에 12층 우리 집, 7층 동생네, 4층 오빠네, 이렇게 한 아파트 한 동에 다 같이 모여 살 수 있게 되었다.
이때가 우리 친정가족 들과의 황금기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난 깊은 우울증과 벗 삼고 살기 시작했고 모두에게 진심으로 사랑받는다고 여기려고 노력하며 114로, 120 다산 콜 센터로, 119 소방서로, 흥신소 심부름센터로, 남의 마음을 들어주는 a good listener로 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만날 수만 있다면
"정말 고생했다고. 아이 때문에 어디서 큰소리로 실컷 울어보지도 못한 니 그 마음 내가 너무 잘 안다고. 너무 참게만 해서 미안했노라고."
반드시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다.
아버지가 집들이에 다녀가신 지 넉 달 뒤 비가 많이 쏟아지던 어느 늦은 봄날 우리는 원래 살던 동네로 다시 이사를 갔다.
떠날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내가 아파졌다는 것.
넉 달 사이에 집값이 많이 올랐다는 것.
그리고 내가 시댁의 영향으로 더한 투사가 되어 돌아왔다는 것 정도였다.
겉으로 달라진 건 없어 보였다.
그때 까지는....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