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균성 뇌수막염에 걸렸다.-첫 번째 죽을 고비
너무 무겁고 자꾸만 처지는 눈을 간신히 뜨고 올려다본 곳은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고개를 돌릴 수도 없이 머리 양쪽을 무엇인가로 받쳐 놓은 것 같았고 간신히 눈을 뜰 때마다 소리를 낼 순 없지만 비명이 터질 것 같은 날카로운 두통이 살며시 뜬 두 눈과 머리 전체를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아마도 여긴 병원 인가 보다.
오른쪽에선 내 손을 붙잡으신 친정아버지가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흐릿한 기억과 뿌연 눈앞의 광경이 너무나 생경해서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아버지 저 괜찮아요. 울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내 말이 소리가 되어 흘러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42°C 가 넘는 고열에 시달리느라 나는 수시로 기절을 했다. (머리 밑과 양쪽 겨드랑이 사이, 그리고 양쪽 무릎 밑에는 커다란 얼음주머니가 놓여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열을 내리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려는 듯 보였지만 그다지 효과를 보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열흘이 넘도록 열은 내려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거든요.)
기절을 하면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두통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었지만 의식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순간은 참을 수 없는 두통과 구역, 구토, 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높은 고열에 견딜 수가 없을 만큼 머리와 몸이 아파왔다.
'세균성 뇌수막염'에 걸렸다.
나는 첫 번째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다시 내가 어릴 적부터 자랐던 동네로, 우리 딸이 태어나고 자란 동네로 돌아오고 난 후 한동안은 아무런 생각 없이 내 병을(갑상선 기능 항진증과 부정맥) 치료하는 일에 전념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사는 곳이 달라졌다 해서 우리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여전히 불면증에 시달렸고 잠시라도 쪽잠이 들라치면 어김없이 9척 장신의 칠흑 같은 어둠이 깃든 검은 남자들이 현관문을 철커덕 거리며 열려고 시도하는 가위에 눌렸으며 머리카락은 매일 한주먹씩 뭉텅뭉텅 빠지는 견디기 힘든 날들이 지속됐다.
게다가 이번에 이사를 하면서 오빠네도 분가를 하고, 신사동 빌라촌에 집을 얻어 결혼을 했던 동생네 집에 도둑이 들어 (3층짜리 신축 빌라를 전세로 들어갔는데 도둑이 가스관을 타고 올라와서 베란다 유리를 자르고 집에 침입해 끼고 나갔던 결혼반지를 제외하고 값나가는 패물들을 몽땅 가져가 버렸습니다. 게다가 집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도망가면서 커다란 식칼을 화장대 위에 올려두고 가버려서 동생 내외는 말할 것도 없고 온 가족이 엄청 놀라게 됐었어요. 그 일 때문에 동생네도 아파트로 옮기기로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참, 글을 쓰며 옛일을 생각하다 보니 별의 별일을 다 겪고 살았네요.-.-;;;) 동생네까지 이사를 결정하게 됐는데 어쩌다 보니 한 아파트의 같은 동에 층만 다른 곳으로 모두 모여 함께 살게 됐다.
그때 마음으론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다.
그냥 아무 말하지 않아도 내 편일 것 같은 친정 가족들이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지금 내가 어떤 지옥을 살고 있는지 말할 수도 말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고 믿었다.
셋이나 되는 아이를 기르느라 항상 쩔쩔매는 새언니를 틈만 나면 도와주려고 애썼다.
그때 막 막내를 임신하고 둘을 데리고 다니며 음식물 쓰레기 한 번, 재활용 쓰레기 한 번 버려주는 법 없는 꼴통 같은 오빠랑 사는 새언니가 안쓰러워 (어른들이나 다른 사람들과 있는 자리에선 항상 새언니라고 깍듯하게 부르고 우리들끼리 있는 자리에선 편하게 말을 놓기도 하고 먼저 결혼한 나를 많이 의지하며 정말 사이좋게 지냈어요. 새언니는 저보다 6살이 어려요.) 나를 친정언니라고 생각하라고 하면서 동네에 소문이 자자 하도록 사이좋게 지냈었다. 새언니는 무슨 얘기든 들어주고 자기편이 되어주며 힘든 결혼 생활에 도움이 돼주는 내게 찰떡처럼 붙어 다니려 노력했다.
자신의 돈 10만 원도 보탠 것이 없으면서 매번 새 언니를 가르치려 들고 '내 집, 내 돈'을 따지는 오빠가 한없이 어리석게 보였지만 동생이라면 모를까 오빠인데도 오빠 노릇을 못하는 모습에 항상 속이 상했고 그런 오빠를 잘 맞춰가며 시부모를 잘 챙기는 새언니가 이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며 한편 안쓰럽기도 했었다.
동생은 처음 회사를 들어갈 때 그 기수의 '수석'으로 입사할 만큼 머리가 좋고 똑똑한 아이였다.
어린 시절엔 부유하지 않았던 우리 집 환경 탓이었는지 항상 농담처럼
"난 결혼은 돈 많고 나이도 많은 그리고 자식은 없는 늙은 홀아비 하고 할 거야. 그래서 돈 걱정 안 하고 편하게 살 거야"
라고 말하고는 했다.
하지만 실상은 회사 선배와 연애를 하다 결혼해 아이를 낳아 내가 뇌수막염이 걸릴 무렵엔 아이의 백일이 조금 지나 밤낮이 바뀌어 매일매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동생은 입덧도 유난하게 하기는 했지만 내가 워낙 심한 입덧과(저는 TV에 음식만 나와도 구토를 심하게 했어요. 낳기 전 날까지 토했고요. 유난 벌떡 이 따로 없었어요. 정말 귀하게 얻은 딸인데.... 제 병간호로 좋은 세월 다 보내게 하네요.ㅠ) 조산기로 고생했던 터라 어떤 신경질을 부리던 받아주려고 노력했고 먹고 싶어 하는 것들을 만들어 주려고 애썼다.
오죽하면 새언니가
"큰 고모, 큰 고모가 나를 정말 사랑해 주고 잘 챙겨주고 누구보다 아껴주는 거 잘 알지만 그래도 핏줄은 못 이기나 봐요. 작은 고모는 아는지 모르겠어요. 본인이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 저도 큰 고모가 친언니면 좋겠어요"
라고 말을 할 정도였다.
그리고 조카가 밤낮이 바뀌어 동생이 너무 힘들어할 무렵부턴 아예 딸을 학교에 등교시키고 동생네 집으로 서둘러 내려가 9시부터 점심때가 될 때까지 아기를 봐주어 동생이 다만 몇 시간이라도 잘 수 있게 배려를 해주려 애썼다.
그러는 사이에 정작 신경 쓰고 돌봐야 했던 내 아픈 몸과 마음은 배려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 심적으로 안정된 것도 아니고 힘을 얻고 위로받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잠시 돌봐야 할 다른 대상이 생겨 힘들고 괴로운 일은 뒤로 묻어두고 다른 일에 매달리고 있었을 뿐이었던 거였다.
어느 누구도 내가 얼마나 아픈지, 고단한지, 지쳐있는지, 마음이 상해 있는지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몰랐다고만 얘기했다. 사랑하는 가족이 피폐해져 가는 것을 본인이 힘들다고 말하지 않아서 몰랐다면 그게 진정한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럼 도대체 그들에게 뭘 하고 있었던 건지.
그때도 지금도 난 혼자 아등바등하며 몸부림치고 있을 뿐이다.
병을 알게 되기 3주 전쯤부터 후두염과 편도선염이 번갈아 오면서 면역력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낫겠거니 가볍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막상 일이 터지기 이틀 전에도 강남 성모병원 응급실에 고열과 오한으로 내원을 했는데 그때에도 병원에선 단순 감기면 병원비가 비싼데 검사하시겠냐는 엉뚱한 소리만 해대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심각한 병에 걸렸을 거란 걸 눈치챌 수조차 없었다.
이동침대가 '덜거덕 덜그덕' 소리를 낼 정도로 흔들리며 오한에 떠는 나를 보고 화가 난 남편이
"이거 보세요. 지금 이 환자 안 보이세요? 병원비가 천만 원이 나와도 낼 테니까 당장 검사해 주세요. 덮을 것도 좀 주시고요. 사람이 죽겠다는데 지금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이렇게 소리를 쳐서야 검사를 받을 수 있었고 '후두염'이라는 진단을 내려주며 자신들도 미심쩍은 마음이 들었는지 "삼일 치 약 드시고도 괜찮아지시지 않으면 꼭 저희 병원 감염내과에 내원하셔서 외래진료받으셔야 합니다"라고 얘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틀이 채 지나지 않은 새벽에 드디어 일이 벌어졌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