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이민을 간 아주버니

눈 뜨고 있는데 코 베어 가시려 구요?

by 강나루

시어머니는 아들 형제만 둘을 두셨다.

4살 많은 아주버니와 막내인 남편.


나이 차이가 그리 많이 나는 것도 아닌데 아주버니는 큰 아들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고 시어머니, 시아버지와 함께 살며 아이들의 양육을 맡기고 아주버니는 집안의 가업을 잇고 있다.

꿀보직이 따로 없었다.

아무리 좋은 게 좋은 거 라지만 부모님을 모신다는 핑계로 아이들 육아는 그냥 당연한 듯 시어머님께서 도맡아 주셨고 원래 살던 집이 있던 곳의 건물에선 1층에서 형님이 미용실을 하시고 아주버가 아버님과 가업을 함께 하셔서 남편이 비집고 들어갈 틈 따위는 애초에 1도 없었다.


남편은 어릴 때 워낙 유복하게 자란 데다 막내로 귀애(貴愛)만 받고 자란 터라 나를 만나기 전까지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했었다. 시댁의 부유했던 시절은 아버님의 사업실패로 애초에 끝나 있었지만 곱게만 자랐던 남편은 삶의 치열함 따위는 모르고 살아왔고 또 알고 싶지도 않아 했었던 것 같았으며 시댁의 모든 식구들이 그것을 다 방조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을 싫어하셔서 생일 챙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던 친정아버지에 비해 시아버지는 또 너무 챙김 받는 것을 좋아하셔서 육순 잔치부터 환갑, 칠순, 팔순잔치까지 안 챙긴 잔치가 없을 정도여서 고생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와 남편이 결혼할 무렵에 육순 잔치를 할 거라고 남편이 얘기해 주며 우리도 돈을 보탰으면 좋겠다고 얘기를 했었다.

그때는 결혼 전에 아무것도 모르는 때이기도 하고 그저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적금을 들어서 결혼 두 달 전쯤 육순 잔치에 200만 원이나 되는 큰돈을 내놓게 됐다.(1992년쯤 됐던 것 같아요. 큰돈이었죠. 결혼도 안 한 상태였는데...)

그 이후로는 아주버니가 직접 전화를 걸어와 명절 때 시부모님께 얼마를 드릴 건지부터 신권을 바꿔달라는 사소한 부탁까지 모두 나를 거치지 않고는 해결되는 일이 없었다.

요즈음에는 육순도 환갑도 다 건너뛰고 칠순잔치부터나 생각하는 집안이 많아지고 그나마도 여행이나 가족모임으로 끝내는 경우가 많지만 오래도록 사회생활을 하신 친정아버지도 마다 하시는 잔치를 때마다 그렇게 챙기시는 걸 이해하기도 어려웠고 뒤늦게 직장생활을 시작한 동생 내외에게 무조건 같은 수준으로 비용을 요구하는 아주버니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시 아버님의 형제분들이 1남 7녀로 워낙 많으신 데다가 명절 때가 되면 제일 큰 사촌 형님댁(큰 시아버지의 첫째 며느리, 친정 엄마보다 두 살 어리 셨어요. 그래도 형님이라고 불렀죠.)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우리 시댁에선 기어코 명절 전날 나를 데리고 사촌 큰 형님 댁에 가셔서 반드시 음식 서너 가지는 만들고 오게 하셨다.


친정에 가까이 산다는 이유로 명절이 낀 연휴가 되면 연휴 전날 저녁 은행을 마치고 시댁으로 향해 연휴 마지막 날 저녁까지 먹고서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또 사촌 며느리들은 아무도 오지 않는 큰 형님댁에 나를 앞세우고 가셔서 5~6시간씩 꼬박 앉아 음식을 만들게 하셨다.

우리 형님은 명절 전날에도 찾아올지 모르는 머리 드라이 손님을 기다리느라 항상 미용실을 오픈하고 있었다. 그 핑계로 큰 집에 차례나 제사 음식 준비에는 한 번도 침석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와 어머니가 큰 형님댁에서 돌아온 늦은 오후에야 시댁에서 먹을 음식을 다 같이 만들기 시작했다.

항상 열받고 억울했지만 어디든 속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곳이 단 한 곳도 없었다.

그리고 설령 말할 곳이 있고 시댁 식구들이 내 얘기를 들을 준비가 돼 있었더라도 그때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난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누구에게든지 칭찬받고 싶은 착한 아이 증후군이었기 때문이다.

이 증후군이 나를 얼마나 오랫동안 억압하고 짓누르고 압박했는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내게 주었다. 내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진작에 소리쳐 말할 수 있었다면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병중에 하나나 둘도 있을까 말까 할 만큼 내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중대한 문제였다.

다만 그때는 그걸 알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지만 지금에라도 내가 어떤 마음이었고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관조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병의 치유의 길로 한 발짝 들어선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위로한다.




그날도 정신없이 바쁘게 손님 응대를 하고 지점장실로 들어가는 전화까지 당겨 받으며 눈코 뜰 새 없이 일을 하고 있는데 남편이 전화를 해서는 느닷없는 말을 해대기 시작했다.

"여보. 형네 이민 가면 나중에 어머니, 아버지 모실 수 있지?"

"갑자기 그건 왜? 나 지금 많이 바쁜데 나중에 집에 가서 얘기해."

"아니, 그냥. 엄마, 아빠 늙고 편찮으시면 그냥 둘 순 없잖아."

"그야. 나중에 연세 드시고 편찮으시거나 두 분 중에 한 분만 남으시거나 그러면... 큰 아들만 모셔야 된다는 법 있는 거 아니니까 모실 수도 있지."

"알았어. 그럼 됐어. 모실 수도 있다는 거지? 모신다고 했다."

이렇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정신없이 바쁜 터라 우선은 전화를 끊고 그 일은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런데 기가 막힌 일은 그날 저녁에 일어났다.

늦은 저녁을 먹고 치우고 있는데 어머님께서 전화를 하셔서는

"ㅇㅇ아. 네가 여기 일산 집에 들어와 살고 큰애네가 너네 강남 집 먼저 빼서 이민 서두른 다는데. 네가 우리 모신다고 했니?"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남편과 했던 얘기는 형님네가 이민 가시고 난 후에 두 분이 사시다가 나중에 있을 일에 대한 얘기였고 또 생뚱맞게 우리 집을 빼준다는 얘기는 무슨 소리 인지?

짐작 가는 바가 있어 조용히 어머님께 말씀드렸다.

"엄마, 진정하세요. 얘기가 조금 와전된 것 같아요. 낮에 아주버님이랑 아범이랑 통화한 것 같은데 저는 자세히 모르거든요. 제가 아범한테 자세히 물어보고 전화드릴게요."

하고 전화를 끊은 뒤 남편을 쳐다보았다.

남편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아니, 형이 전화해서 집이 안 빠진다고.

우리 집 먼저 빼서 가고 우리가 일산 집 들어가 살다가 나중에 일산 집 빠지면 그만큼 빼서 다시 분가하던지 그 김에 모시던지 하라고 해서..."

너무 화가 나고 약아빠진 아주버니의 행태에 기가 막힌 나는 남편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 집이 누구 건데 누구 마음대로 빼준데? 당신 거야? 내 거잖아!!! 당신 사고 치고는 내 명의로 바꿨잖아. 여태껏 돈 얘기는 다 나한테 하더니 급하니까 나를 건너뛰네. 웃기고 있어.

내가 빙다리 핫바진 줄 아니? 누구 맘대로 빼고 주고 한대? 이혼 안 당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고 살아. 어디서 되지도 않는 수 쓰고 있어.

이민 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 그래. 그리고 내 거에 침 바를 생각 하지도 말라그래. 아예 꿈도 꾸지 말라그래. 살다 살다 별 웃기는 소리를 다 들어보네. 친정아버지가 아주버니 일 신경 써줬을 때도(친정아버지가 시댁 쪽 일을 크게 도와주셨었어요.) 인사 한번 없어서 사람 민망하게 하더니 끝까지 정말 더럽게 정 뗀다.

어머니한테 당신이 전화해. 나한테 피해 1도 안 가게."

"여보.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 전화 내가 할게 화 풀어."

이 일은 하나의 에피소드처럼 묻혔지만 그동안 종이가면으로 가려져던 시가 식구들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줬다.

아주버니네는 결국엔 이민을 갔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15년 만에 한국으로 처음 돌아왔을 때에도 우리에게 잊지 못할 상처를 남겨주게 다.


역시 이 집 이 씨들하고 나는 안 맞는 게 확실하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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