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의 한판승 1:0. 이번에는 내가 이겼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by 강나루

응급실에 도착한 후 엄마는 전사처럼 변했다.

너무 심한 두통에 몸부림치는 나를 보다 못해 제부에게

"김서방, ㅇㅇ이 머리 좀 양손으로 꽉 눌러줘.

그리고 이스방(남편)은 ㅇㅇ이가 자꾸 토하니까 물티슈 하고 비닐봉지 구해와. 사 오던지."

그렇게 말씀하시곤 의료진들에겐

"죄송한데 빨리 봐주셔야겠어요. 빨리!!! 이틀 전에도 왔다 갔다는데 대체 뭐가 잘못된 거예요. 인턴 말고 제대로 볼 수 있는 선생님 불러다 주세요. 이러다 사람 죽겠어요!!!"

라고 재촉 하셨다.


나는 '요추천자 '검사와 'MRI'검사까지 진행해야 했고 '세균성 뇌수막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 당시엔 이 병이 얼마나 위험한 병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처음 겪는 극심한 두통과 고열, 몸을 관통하는 듯한 격통에 누구든, 무엇이든 내게 처치를 해주기 바랐고 내가 단순 바이러스 성 뇌수막염이 아닌 것이 밝혀진 후에는 복잡한 응급실의 한가운데서 조용하고 외진 구역으로 옮겨지며 드디어 '신경과 담당 교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입원실이 나기를 기다리는 중에 아침이 되어 시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응급실로 달려오셨는데 시어머니는 요추천자 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 다 죽어가는 몰골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자마자 폭풍 같은 눈물을 쏟아내셨다.

그 후로도 20 여일이 훌쩍 넘는 입원기간 동안 시어머니는 여러 차례 병원에 오셔서 혹여라도 내가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노심초사하셨다.(물론, 시아버지는 응급실에 오신 이후로 병원에 오신 적도 전화를 하신 적도 없었습니다. 여자가 자주 아프면 남자가 바람을 피우는 거라고 아픈 며느리에게 말하시는 분인데 오죽하셨겠어요.)


응급실을 방문한 그날 저녁 무렵이 돼서야 병실로 올라갈 수 있었고 우리 딸을 돌봐야 했던 친정엄마는 서둘러 돌아가시고 간병은 자연스레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이 맡게 되었다.

남편은 링거줄이 꽂힌 상태에서 환자 복으로 갈아입히는 방법도 제대로 알지 못해 자꾸 의식을 잃는 나와 남편 둘이서는 옷조차 못 갈아입고 누워 있는 사이에 퇴근한 제부에게 아이를 잠시 맡겨 놓은 동생이 병원으로 달려와 도움을 주었다.

동생은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터트리며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끅끅'소리를 내며 내게 얘기를 했다.

"언니!! 정말 미안해. 다 나 때문에 언니가 이렇게 아픈 거야. 미안해 언니. 정말 미안해. 몸도 안 좋은데 매일 아기 보러 내려와서 고생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아프지 않았을 텐데... 언니 힘든 거 잊어버리고 나랑 아기 생각만 해서. 미안해. 언니 꼭 나아야 돼. 꼭!"

나를 환자복으로 갈아입혀준 동생은 한참을 울다가 내가 의식을 잃은 후에 집으로 돌아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의식을 되찾은 나는 높은 고열로 몸 안의 수분이 부족해 병원에서 많은 양의 수액이 빨리 몸 안에 들어가게 해 놓는 바람에 급하게 화장실이 가고 싶어 졌다.

하지만 우리의 공식적인 빌런 이스방(남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역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아까 의료진이 병실로 옮겨 주면서 고열 (41~42.3°C까지 보름 가까이 열이 내리지 않았어요.ㅠ) 때문에 어지러움이 심해 낙상의 위험이 있으니 보호자의 동행 없이는 혼자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는 얘기를 신신당부했었다. 그리고 사실 의료진이 얘기하지 않았어도 절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누워 있어도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눈을 떠도 어지럽고 눈을 감아도 어지럽고 그냥 빨리 이 힘든 시간이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화장실이 가고 싶은 이 중차대한 순간에 (빌어먹을) 이스방이 눈에 보이지 않는 거였다.

집을 나오는 순간에 내가 의식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휴대폰도 챙기지 못했는데!

밤새도록 소변을 참고 있어야 했다.

의식을 잃으면 실수라도 할까 봐 죽을힘을 다해 버텼다.

참는 데는 이골이 난 나였지만 남편이 나타나는 순간에 '이번엔 정말 죽여버리리라' 마음먹었다!!!


남편은 병원 조식이 나오는 시간인 7시 반이 돼서야 병실이 나타났다.

"여보, 밥 나왔는데 조금이라도 먹을 수 있겠어?"

너무나 아파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나는 남편에게

"아니, 자기 지금 어디 갔다가 이제 온 거야? 간병하겠다는 사람이 밤새 병실을 비우면 어떻게 해? 화장실부터 갈 거야!"

이틀 사이에 너무 쇠약해지고 고열에 몸이 휘둘려 혼자 몸을 일은 킬 수도 없었던 나는 그제야 화장실을 다녀올 수 있었다.

남편은 자신이 코를 골면 내가 잠을 자지 못할 것 같아 밖에서 잠을 자고 왔다고 얘기를 했다.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지! 고열과 구토, 동통에 시달리는 중증 환자가 잠을 잘 수 있을 거라는 생각과 밤새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첫날 병실을 비울 생각을 하는 남편의 발상이 이해가 안 됐지만 그 힘든 상황에 말다툼을 할 여력도 되지 않았거니와 지금 내가 의지할 사람은 남편뿐이라는 생각에 그냥 입을 다물수밖에 없었다.


20여 일이 넘는 입원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문병을 왔다 갔다.

나와 친했던 지인들은 형편없이 마른 데다 두통과 고열로 여기저기 얼음주머니를 차고 얼굴은 늙은 호박만큼 커다랗게 부어 말도 몇 마디 제대로 못 하고 수시로 의식을 잃는 나를 보고 울고 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난 내가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그저 내가 눈을 감았다 뜨면 내 옆에 앉아 울고 있는 사람이 바뀌는 것을 보며 내가 쉽지 않은 병에 걸렸다는 것을 짐작하기만 했었다.

친정아버진 바쁘신 중에도 아침, 저녁으로 병원에 들르시며 나를 보고 안타까움에 수시로 눈물을 흘리셨다.

본인이 하실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조금이라도 나를 편안하게 해 주려 애쓰셨고 무엇보다 첫 손녀인 우리 딸이 엄마와 떨어져 있는 것을 힘들어하지 않게 세심하게 신경을 써주셨다.(그때 딸이 초등학교 1학년이었어요.)


퇴원 후 나중에 들은 얘기에 지니는 한 번도 엄마가 보고 싶다거나 떼를 쓰며 애를 먹인 적이 없어 그것 또한 너무 안쓰럽게 여기셨다 한다.

하루는 저녁을 일찍 먹은 후 졸리다 하여 방에 재운 후 한 시간쯤 후에 잘 자는가 싶어 문을 열어 보았더니 이불을 뒤집어쓰고 훌쩍이고 있어 들어가서 안아주며 왜 우느냐 물어보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다고. 엄마가 많이 아픈데 병원에도 안 데려가 주는 게 다시는 엄마를 못 보는 게 아니냐' 며 펑펑 울었고 그때까지 내 병에 차도가 없어 노심초사하시던 엄마 아버지는 지니를 안고 한참을 우셨다고 했다.


내 병은 입원한 지 20여 일이 가까워질 무렵이 돼서야 열이 잡히기 시작했다.

열이 내리기 시작하고 항생제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후에야 다를 증상들도 잠잠해지기 시작했고 천만다행으로 '세균성 뇌수막염' 환자에게 많이 남는다는 후유증 한 가지도 없이 퇴원할 수 있었다.


이번엔 다행히 내가 병을 이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남편의 잘못으로 인해 마음의 병으로 생긴 스트레스로 무너져 갑상선 질환과 부정맥을 얻고 한번 무너진 몸의 균형은 앞으로 내게 여러 가지 고난을 주게 된다.


내 마음이 조금 더 단단했더라면.

내가 나를 더 사랑했더라면.

내가 남편을 조금 더 빨리 용서했더라면.

남편이 내게 진심으로 사과했더라면.

남편이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나는 불치병이 없는 건강한 몸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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