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집착: 오늘부터 1일, 다시 시작하면 돼
영어 앱으로 얻은 깨달음 한 조각
영어 공부를 위해 무료 영어 앱을 다운로드해 쓰고 있다. 그 앱은 매일 10분 이상 사용하면 1일씩 날짜가 누적되는 시스템이다. 매일 조각 케이크 먹듯 영어공부를 맛있게 할 수 있도록 만든 그런 달콤한 앱이다. 공짜 앱치곤 콘텐츠가 정말 훌륭하다. 처음에는 그냥 썼다. 직장 맘인 나, 여유 있는 날은 10분 이상 진지하게 하지만, 바쁜 날은 깜빡하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어느 날 동그라미 안 숫자가 30을 나타내고 있음을 봤다. 어느새 한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영어공부를 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본 것이다. 그 순간 이후 왠지 모를 욕망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 날짜를 계속 200일, 300일까지 채우고 싶은 욕망 말이다.
그날 이후 주말 아침이면, 눈을 뜨자마자 영어 앱을 켰다. 영어 앱 출석 동그라미에 하루를 더하고 나서야 하루가 시작되었다. 평일엔 점심시간을 쪼개어하고, 어떤 날은 퇴근하자마자 영어 앱을 켰다. 벌써 169일. 내일이면 170일이 된다. 스스로 얼마나 뿌듯하고 대단하다 만족했는지. 곧 200일이닷. 아자아자!!
그런데 그날 저녁 이렇게 글을 쓰다가 깜빡 밤 12시가 지났다. 화들짝 놀라 들어간 영어 앱엔 무참하게도 다시 0이라는 숫자만 깜빡이고 있었다. 그 허무함과 절망이란.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미련하게 영어 앱 오늘의 미션을 마무리하고 글을 쓸 걸, 쓰던 글이 더 이상 써지지 않았다. 노트북을 꺼 버렸다. 어리석고 바보 같았던 자신을 탓하며, 후회하고 후회했다. 잠자리에 누웠는데도 잠이 오질 않았다. 6달째였다. 반년 동안 지켜온 나만의 루틴을 증명할 숫자였다. 성실함과 노력을 증명할 숫자 말이다. 스크린 캡처도 100일째 되는 날 했었고, 곧 다가올 200일째 하려고 뜰떠 있었는데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그러다 순간 깨달았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마음이었는지 말이다. 우린 무엇인가에 의미를 부여하고 애정 하기 시작하면 집착이 생긴다. 별것 아닌 영어 앱 출석 날짜에 스스로 성실의 의미를 부여하고 집착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놓쳐버린 한순간 때문에 괴로워했다. 도대체 이게 뭐라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경제적 이익이 생기는 것도, 영어 실력이 향상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마음의 집착일 뿐이었다.
갑자기 생각난 이야기 하나, 어느 선사에 노스님이 무소유의 가르침을 받아 수행을 하고 계셨다. 우연한 기회에 선물 받은 난 화분 하나를 키우게 되셨다. 처음엔 그저 난 화분이었을 뿐인데, 오래 키우다 보니 정이 들어 스님도 모르는 집착이 생기셨나 보다. 어느 날 스님이 장기간 자리를 비울 일이 생기자 난이 걱정되어 어쩔 줄 몰라하던 당신을 발견하고, 당신이 난에 집착하고 계셨음을 깨우쳤다는 일화였다. 딱 그런 모양새다.
우리 살다 보면 그런 일들이 참 많지 않나? 어떤 사물이나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애정 하기 시작하면 집착이 생긴다. 그 집착이 지나치면 나와 같이 주객이 전도된 괴로움이 생긴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앱을 쓰는 건지, 앱을 쓰기 위해 영어를 배우는 건지. 시작의 본질은 사라지고, 결과나 껍데기만 남아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 말이다.
어쩌면 남편도 아이들에 대한 마음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 대한 애정이 지나쳐 집착하게 되니, 내 맘 몰라주는 남편 때문에, 공부 안 하고 말 안 듣는 아이들 때문에 괴로웠던 적이 많았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결국 괴로움의 원인은 나의 기대와 집착이었는데, 그들을 탓하며 마음을 괴롭히진 않았는지 반성하게 된다. 별 것 아닌 영어 앱 출석 동그라미에 인생의 큰 교훈을 얻었다. 169일을 잃었지만, 그 보다 더 큰 가치를 깨우친 날이다.
피식, 웃는다. 오늘부터 다시 1일이다. 두 번 다시 괴로워하지 않으리. 다시 0일이 되는 날엔, 또다시 1일부터 시작하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