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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 May 20. 2024

우리가 매일 씻는 것들

오늘 더 깨끗해지자.


어렸을 적 시골에서 지내던 때를 떠올려보면 그려지는 장면이 있다.

엄마는 자주 마당에서 빨래를 하셨다. 나무로 된 빨래판, 파란색 무궁화 빨랫비누로...

그리고 힘차게 움직이는 엄마의 두 팔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얼룩이 심한 빨래는 빨랫비누로 쓱쓱 빨아서 찜솥에 삶으시던 엄마. 그 빨래 삶는 냄새를 좋아했던 나.


시골의 작은 초등학교를 다니던 나는 늘 2km 정도 되는 길을 매일 걸어서 다니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대단했다 싶지만 그 시절은 남는 게 시간이었으니 학교 가는 길이 그저 놀다 걷다 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가끔씩 하굣길에 마을 회관 앞을 지날 때는 툭툭 둔탁하게 뭔가를 내려치는 소리가 났는데, 그 소리는 마을 회관 작은 다리 밑 시냇가에서 동네 할머니들이 빨래하는 소리였다. 그 모습이 하도 재미있어 한참을 바라보기도 했다.

방망이로 때려서 빨래를 한다는 건 어린 나로서는 그냥 지나치기 힘든 무척 흥미로운 구경거리였다.

빨래를 두들겨 패다가 시냇물에 적셔 헹구고 꼭 짜서 자주색 고무 대야에 담아 빨랫감을 머리에 이고 가는 할머니들의 뒷모습까지 다 지켜본 후에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빨래방망이가 갖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중학생이 되어 초경이 시작되고부터는 내 속옷을 손으로 빨기 시작했던 것 같다.

늘 엄마의 도움만 받고 지내던 내가 일종의 빨래 독립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종종 빨래가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물을 묻혀 비누를 문지르고 다시 빨랫감을 요리조리 뒤집으며 깨끗이 하는 그 과정이 재미있었다.

지금도 작은 빨랫거리들을 손으로 빨 때, 그리고 털어서 널 때 기분이 좋다.


비누를 좋아하는 내가, 몸 씻으며 마음도 씻는 것 같다는 내가... 몸을 감싼 옷가지들을 손으로 세탁하는 행위를 즐겨하는 것은 씻어내는 자체에 큰 의미를 두었다는 것은 아닐까?

무언가를 깨끗이 한다는 것, 하루의 때를 말끔히 지우고 내일은 다시 맑고 깨끗한 나로 지내보겠다 하는 다짐 같은 것이었으리라.


때로는 몸속의 때를 벗기기도 한다. 몸속 때는 어떻게 씻느냐고? 그저 비우면 된다.

지난주 며칠 단식을 했다. 비누로 씻어낼 수는 없지만 가끔 내 몸속 위와 장에 휴식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늘 온갖 음식에 절어 쉴 틈 없는 위와 장. 그저 묵묵히 소화를 시켜내지만 40여 년 묵은 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며칠 비우고 나면 얼굴빛도 마음도 빛이 나는 기분이다. 어디 기분만 그럴까? 정신은 더 또렷해진다. 책을 읽을 때도 맑아진 마음으로 잘 받아들이고, 글을 쓸 때도 새 종이에 쓰는 기분이 든다.


새삼 ’ 씻어냄‘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몸과 마음, 정신을 깨끗하고 단정하게 하는 것. 그렇게 맑아진 나는 모든 상황을, 사람들을 다정함으로 끌어안을 수 있을 것만 같다.


프랑시즈 퐁주는 그의 저서 <비누>에서 ‘지적 세척’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는 비누를 통해 씻어내야 할 것은 바로 감성적 세계를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세계를 위해 희생시키려는 사상들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인간 정신을 진정한 자유로 이끌지 못하는 모든 교조적이고 끈적끈적하고 비장한 이데올로기들. 그것들을 세척해야 한다고 말한다.


퐁주는 그 도구, 비누를 ‘조약돌’이라는 재미있는 단어로 표현했다.

우리는  ‘지적 세척’을 하고 있을까? 퐁주가 말하는 조약돌. 각자의 조약돌로 말이다. 나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영적 세척’까지도 말하고 싶다.

 우리는 매일 세수를 하듯 몸과 마음, 영혼의 때를 벗겨낼 필요가 있다.

사용되지 않고 비눗갑에 놓여있는 비누는 갈라진다.

반복되는 세정의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 그리고 내면의 신과 마주할 때 더 맑은 존재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나는 오늘 어떤 ‘조약돌’을 갖고 있는가?

나는 매일 씻어내고 있는가?

거창한 이야기 같지만 정신의 세척을 위해서는 한 조각의 비누와 세숫대야면 충분한 것이다.

누군가는 기도로, 누군가는 명상으로 또 어떤 누군가는 치열한 삶터에 쏟아내는 땀으로... 그 도구들로 매일 씻어낼 것이다.

오늘 나의 비누, 나의 세숫대야를 바라보자.

매일 반복되는 씻어냄 의식을 통해 오늘 더 깨끗해지자. 깨끗해진 가슴으로 세상을 끌어안자.

우리는 자연에 머물며 묵은 때를 벗기도 한다.

- 이것으로 <내 오랜 벗, 비누> 연재를 마칩니다.

모쪼록 ’ 비누‘이야기가 많은 분들의 마음의 때를 벗겨주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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