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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 May 13. 2024

그때의 향, 지금의 향

향을 좋아했던 소녀


1990년대.

종이비누라는 것이 있었다.

비누는 비누이나 종이만큼 얇은 두께의 비누.

평소 손 씻기를 즐겨하지 않는 아이라도 한 번쯤은 가져보았을 그 비누가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색은 주로 연핑크이고 조그만 종이 케이스에 티슈처럼 뽑아쓸 수 있는 비누였다.

향은 장미향. 그 시절 군것질 할 돈을 아껴 종이비누를 사쓰던 한 소녀가 있었다.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종이비누 한 장 꺼내어 손을 씻는다. ‘조금 더 오래 거품을 칠하면 손에서 좋은 향이 오래 유지될까?’ 하는 마음으로 부지런히도 비벼댄다.

수업 시간에 앉아서 자신의 손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는다. 손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쉬는 시간에 다시 종이비누 한 장을 꺼내어 화장실로 간다.

또다시 손을 씻고는 마른 종이비누 한 장을 슬며시 주머니에 넣어두고 비누 향이 맡고 싶을 때 꺼내어 맡는다.


소녀의 유아기, 아마도 유치원시절일 거다.

빠글빠글 머리를 볶은 유치원 선생님. 그분을 기억한다. 그 선생님 옆에는 늘 좋은 향이 났다.

선생님을 무척 좋아했던 소녀는 늘 선생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선생님 냄새를 맡곤 했다.

‘무슨 향일까. 나도 저 향을 갖고 싶다.’ 하고 생각하며...

시간이 흘러 청소년이 된 소녀는 우연히 들른 팬시점에서 엄지손가락 만한 작은 유리병에 담긴 색색의 쌀알들을 보게 된다.

사실 그건 쌀알이 아닌 쌀알 크기의 투명한 젤리질감의 향수였다.

소녀는 용돈을 털어 작은 유리병에 든 그 향수를 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유치원 시절 그 선생님의 향이 나는 게 아닌가.

그 시절, 좋아하던 선생님을 유심히 바라보며 ’ 저 향은 뭘까?‘했던 그때를 떠올리는 소녀.

향을 맡으며 마음으로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시골에서 자란 소녀는 꽃향기, 풀향기, 해 질 녘 집집마다 피어오르는 굴뚝 연기 냄새.

볏짚 태우는 향기 등을 맡으며 자랐다.

성인이 되어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입덧이 너무도 심해 힘들었는데 출근길 운전 중 한 시골마을을 지나며 맡는 볏짚 태우는 냄새... 그 냄새를 맡는 순간 입덧이 멈추었다고 한다.

편안한 곳의 향기, 기억이 준 선물이다.

소녀는 후각을 비롯해 다른 감각들도 연달아 열리기 시작했고 성인이 된 지금 더 감각에 집중하는 삶을 살고 있다.

늘 자연 속에 머무르며 눈에 보이는 것 그 너머의 것을 보고 있다.

어른이 된 소녀는 인공의 향이 가득한 한 도시에서 철저한 생태주의자가 되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을 가슴에 품고 산다. 적도의 태양 기운을 몸소 받으며 살고 있다.

그리고는 매일 씻는 비누 향으로 친구를 떠올리고,좋아하는 라벤더 향을 맡으며 누군가를 떠올린다.

향은 그렇게 소녀의 삶에 깊이 스며들었다.


1990년 그때.

종이비누 향을 맡던 소녀.

그녀의 삶은 지금도 늘 향기로 가득 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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