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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 Apr 29. 2024

비누 빚는 마음

비누로 만난 사람들

아침에 눈을 뜨면 곧장 욕실로 가 세수를 한다. 항상 내가 좋아하는 향의 비누가 세면대에 누워있다.

그 비누는 늘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저녁이면 또 나를 반겨주고 학교에 다녀온 아이들을 반겨준다.


한때 비누를 열심히 만들어 쓰던 때가 있었다.

제로웨이스트 실천의 한 가지 방법으로 비누 쓰기를 선택했다. 샴푸, 린스, 바디클렌져, 폼클렌징 등 ‘한 번의 샤워를 위해 수많은 세정제들이 꼭 필요할까?’하는 생각에서 출발한 욕실 제로웨이스트.

비누공방에서 비누를 만드는 방법을 배워 집에 와서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비누 만들기도 아주 복잡하고 재료가 많이 드는 것이다. 간단한 비누라도 베이스를 잘라 다시 녹여내는 그 과정이 너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아무리 천연비누라 해도 꼭 들어가야 하는 계면활성제가 거슬렸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그러다 두 딸이 가지고 노는 클레이라는 촉감놀이 찰흙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

그래. 주물러서 만들어보자. 옥수수전분을 사 와 코코넛에서 추출한 가루와 함께 주물러 만들었다.

평소 좋아하는 라벤더 오일을 조금 넣고 주물러 완성. 흡사 조약돌 같은 이 비누는 내 시그니처 비누가 되었다. 이웃들에게 하나씩 선물로 주며 욕실 제로웨이스트를 권유하기도 했다.


여행을 갈 때에도 이 비누 하나만 있으면 오케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고 잘 말려두었다가 또 쓴다.

마을에서 아이들을 불러 모아 함께 만들어 보았다. 비누에 들어가는 재료에 대해 이야기하고 비누를 주무르며 서로의 안부를 물어가며... 또 우리는 너무 많은 세정제로 물을 오염시키고 있다는 이야기를 자연스레 할 수 있는 자리를 가졌다.


딸이 다니는 학교는 시골의 작은 학교인데 가끔 학부모가 주도하는 동아리 활동이 있다. 그때도 옥수수전분을 들고 가서 학부모들과 주물럭 비누를 만들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비누를 ‘빚는다’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만두를 빚듯이, 그릇을 빚듯이... 비누를 주물러 빚는 동안 내 곁의 사람들의 눈을 마주하며 이야기 나누는 순간이 참 좋다. 거창하게 환경교육이라는 말을 붙여가며 하는 프로그램보다도 비누 빚기를 통해서도 충분히 삶에 대해, 생태환경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


한 때에 경주의 초등학교 특수학급 방학 수업에 강사로 몇 번 간 적이 있었다. 몸이 불편한 친구들과 주물럭 비누 만들기를 하러 간 것이다. 평소에 쓰는 제로웨이스트 도구들도 소개했다. 도우미 선생님이 계셨지만 특수학급 친구들은 수업 중 돌발이 항상 있었고 비누 모양은 제각각 작품으로 보자면 실패작이라 할 수도 있었다. 또 나보다 덩치가 큰 남학생이 비누 가루를 다 던져버려 교실이 초토화된 일도 있었다. 선생님 두 분은 헐레벌떡 청소기로 정돈하시느라 바쁘시고... 아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손발을 흔들어댔다. 수업이 멈추고 나는 연신 그 친구의 등 쓰다듬었다. 비누를 쓰다듬듯 그 친구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작게 더 작게 이야기했다. “괜찮을 거야. 조금만 있어보자. 오늘 만든 비누를 선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니?” “네, 엄마요.” 이어지는 대화에 아이의 화는 수그러들었고, 내 눈을 보며 끔뻑거리는 아이의 두 눈에 내 모습이 비쳤다. 우리는 비누라는 도구로 교감하고 있었다.

그 수업으로 비누를 빚는다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각자가 만든 비누를 집으로 가져가 가족들에게 “우리 비누 하나로만 씻기 실천해 보자.”하고 이야기해보기를 권했다.


비누는 훌륭한 도구이다.

오래전 비누의 출현으로 인류는 전염병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우리 일상에 비누 한 장이면 깨끗한 생활을 할 수가 있다.

내가 만든 비누는 내 것이라는 소유의 의미를 넘어 가족과 이웃과 함께 만들고 사용하게 될 때 비누 한 장만으로 충분한 삶을 이야기 나눌 수 있다.

욕실 제로웨이스트는 그런 것이 아닐까? 수많은 플라스틱 병을 줄 세워 때 빼고 광내는 공간이 아닌 비누 한 장만으로도 충분한 몸 씻기의 공간.


프랑시즈 퐁주는 비누를 아름다운 조약돌이라고 했다. 작은 조약돌 같은 비누 한 장이 내 욕실을 제로웨이스트 공간으로 만든다.

이 조약돌을 함께 빚을 날을 또 기대해 본다.

기후위기를 막는 일은 어쩌면 터진 둑을 막고 있는 어느 아이의 팔 한쪽 같은 건 아닐까?

거대해 보이는 문제 앞에 매일의 실천을 쌓아가는 꾸준한 마음. 매일 쓰는 비누 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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