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하면 걸어라
많이 걸어 몸살이 났던 걸까. 아니면 따뜻한 곳에서 지내다 갑자기 추운 겨울 나라에 간 탓에 몸이 아팠던 걸까? 아니면 둘 다 이유일까? 여행 마지막날 아팠던 몸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듯.. 그때가 떠오른다.
어찌나 아팠던지 마음의 고통 보다 몸의 고통이 훨씬 더 정신에 영향을 준다고 느낄 정도였다. 인간은 육체의 고통을 뛰어넘을 수 없는 존재인가 싶기도 했다.
비엔나에 가기 전 한동안 프라하에 있었다. 늘 유럽의 도시들은 사람들을 걷게 한다. 몸 움직이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맞춤 여행지가 유럽이라 할 수 있겠다.
작년 런던, 파리에서... 또 바르셀로나, 로마에서 도심의 기운을 한껏 느끼며 걸었을 때, 자연 속이 아니라도 상쾌한 무언가가 온몸을 휘감았다. 그냥 걷기만 했을 뿐인데 말이다.
이번 프라하-드레스덴-비엔나 여정에서 가장 많이 걸었던 곳은 프라하, 그것도 구시가지 까를교 주변을 많이도 걸어 다녔다. 걸으며 만나는 풍경들은 도시마다 다르겠지만 프라하만의 느낌을 마음에 담으며 밤낮으로 걸었다.
아침에는 찬 공기를 맞으며 아이들과 공원을 걷고, 또 혼자 산책을 하다 한 카페에 앉기도 했다. 누군가와 함께 걸을 때는 같은 풍경을 바라봤지만 혼자 걸을 때에는 눈앞에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하루는 아이들이 쉬는 틈에 3만보를 걸었다. 아침에 스트라호프 수도원으로 가는 산책로를 올랐다.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다 더워져 외투를 벗었다가 또 평지로 가니 추워 옷을 다시 껴입기도 했다. 수도원 양조장에서 흑맥주 한잔을 꿀맛같이 마시고 내려와 성 니콜라스 성당으로 향했다. 200개도 넘는 성당 종탑 계단을 오르니 걸어야만 볼 수 있는 선물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한눈에 보이는 프라하의 풍경들... 갈색의 지붕 그리고 푸른색 돔들. 그 사이사이로 보이는 건물 꼭대기에 선 다양한 모습의 조각상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오래된 건물이기에 다리의 통증을 극복해야 만날 수 있는 높이, 그곳에서의 시원한 바람은 마치 저 멀리 우주에서 불어오는 듯했다.
종탑에서 내려와 카를교를 걸었다. 다리 양쪽에는 수많은 조각상들이 있다. 대부분 성자들의 모습을 형상화해 놓았다. 아기 천사도 보인다. 카를교는 언제나 북적였다. 카를교는 그저 통과하기 위한 용도만이 아닌 어떤 광장 같은 느낌이었다. 맘에 드는 조각상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 또 거기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사람. 그 옆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도 보였다. 조각상들과 예술가들, 여행가들이 한데 어우러진 아주 큰 무대 같아 보이기도 했다. 도시를 잇는 다리 하나, 그 위에 사람들의 웃음소리까지 얹어지니 멋들어진 공연장의 중심에 선 것 같았다.
카를교는 강위의 돌다리 그 이상의 의미로 내게 남았다.
프라하에서는 다리가 아프도록 걸었던 기억. 성당 종탑을 올랐던 기억이 생생히 남았다. 그리고 핫초코. 추위에 떨다 한 가게에 앉아 큰 딸이 시킨 핫쵸코를 슬쩍 뺏어 먹었는데 너무 달콤하고 행복했다. 프라하 중앙역에서 마셨던 걸쭉한 핫초코도 느끼한 달콤함으로 포만감 마저 들었다. 힘든 몸을 핫초콜릿이 녹여주었다. 당충전을 오랜만에 한셈.
한날 프라하성 주변을 거닐었다. 프라하성은 기네스북에 오른 세계에서 가장 큰 옛 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프라하 성 뒤편 오래된 고딕 양식의 성 비투스 성당이 눈에 띄었다. 그림 같던 성당을 멀찌 감치 서서 언 손을 불어가며 한참 바라보았다.
어느 날 아침 스트라호프 수도원 오르는 길에 저 멀리 성 비투스 성당이 작게 보였다. 가까이서 볼 때와 달리 나무와 언덕과 어우러진 성당은 멀리 서는 몽환적인 느낌과 웅장한 종소리가 합쳐져 또 한 번 가슴을 울렸다. 그 종소리에 멈춰 섰다가 종소리가 멈추면 걷곤 했다. 리듬을 타는 발걸음이 경쾌했던 그 아침.
우리의 인생길을 떠올렸다. 걷기를 하듯 이어지는 매일의 일상들... 때로는 쉬기도 하고 또 어느 때에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정상의 상쾌함을 맛보기도 하는....
낮은 곳에서 보는 사람들의 눈빛과 생기, 그리고 높이 올라가면 보이는 도시가 주는 광활함, 그 전체를 감각하며 갖는 나와 우주의 연결감...
아름다움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다가도 이내 또 걷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매일의 날들...
걸으며 많은 것을 발견한듯했다.
나는 걷기 예찬론자 까진 아니지만, 어느 도시에서건 매번 걷다 보면 정리되는 마음들이 있다.
일상의 소소한 일거리를 제쳐두고 떠나온 여행에서는 설거지나 청소 걱정 없이 걷기만 할 수 있으니 대놓고 걷는 매일이라니, 걷는 여행이 주는 매력이 얼마나 큰지... 내게 여행이 뭐가 좋으냐 묻는다면 당당히 매일 걸을 수 있어 좋다고 하겠다.
때로 우울이 찾아오더라도, 기쁨이 넘치는 순간에도 그저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또 다른 나. 늘 걷기만 한다면 도심의 소음 속에서도 고요히 나를 만날 수 있으리라. 단, 잠자리에 들기 전 고생한 다리와 발은 잘 주물러줘야 하겠지만.
히포크라테스의 말이 조금은 수긍이 가던 여행이었달까?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지.
우울하면 걸어라.
그래도 우울하면 다시 걸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