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여름만 되면 자주 아팠다. 어른들은 굳이 '개'까지 들먹이며 혀를 차곤 했다.
“쯧쯧! 오뉴월에는 개도 감기 안 걸린다 카는데! 어디 묵을 게 없어서 더위 묵었드노?”
입맛 잃고 누운 손녀를 위해, 할매는 목이 다 늘어진 하얀 러닝과 속치마를 벗어던지고 씩씩하게 장을 보러 출타하곤 했다. 돌아오는 할매의 손에는 싱싱한 열무가 들려있을 거였다. 새파랗고 씩씩한 줄기 끝에 새초롬한 아기 무가 조랑조랑 달려있던, 그 열무. 나는 그 무(?)를 아기 무,라고 부르며 좋아했는데 할매는 열무를 한가득 사 와서 아기 무가 달린 열무만 골라내어 김치를 담갔다.
할매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을 시작하면서도 거친 입은 쉬지 않았다. 엄마를 흉 볼거리가 생겨 신이 난 듯 보이기도 했다.
“지 새끼가 밥을 안 묵고 있는데, 기울러서(게을러서) 아무것도 안 하제? 머 만들라카면 하루 종일이고. 이게 뭐가 어렵다꼬!”
할매의 물김치 맛을 아는 나는, 엄마를 향한 비난과는 상관없이 그때부터 입에 침이 고이기 시작한다. 할매는 열무를 숭덩숭덩 잘라 굵은소금을 후드득 뿌리고, 깨끗하게 씻은 돌을 얹어 절였다. 무와 사과를 아낌없이 갈아 풀물과 섞고, 절여 놓은 열무에 부으면 어느새 새콤한 열무 물김치가 만들어졌다. 이제 갓 담근, 풋내가 풀풀 나는 김치를 내가 지금도 좋아하는 것은 아마 그렇게 먹었던 김치의 맛을 잊지 못해서일 것이다. 할매는 물김치를 내가 먹을 만큼만 덜어 빨리 삭히기 위해 내어 두고, 찬장에서 된장 뚝배기를 꺼냈다. 멸치 한 줌 넣고 된장과 파만 넣어 자박하게 끓인 찌개. 된장 콩이 숨이 죽지 않고 모양 그대로 살아있어 바닥에 넉넉하게 깔려 있었다.
할매는 엄마를 앞세워 물김치와 된장찌개, 갓 지은 하얀 밥만 놓인 앉은뱅이 밥상을 내가 있는 방으로 가져왔다. 그리고는 막 담근 열무 물김치 속 열무 줄기를 하나 손으로 집어 된장찌개에 푸욱 적신 뒤 내 입에 들이밀었다. 된장찌개의 맛을 입은 풋김치의 맛. 그것은 입맛을 돌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입이 짧고 잘 먹지 않았던 동생에 비해, 나는 뭐든 잘 먹었기에 아플 때 떨어지는 나의 입맛은 할매와 엄마의 관심을 끌어주는 고마운 것이었다. “한입만 더 묵자.” 그 말이 달콤해서 나는 괜히 입을 앙 다물어 보곤 했다. 할매가 부엌에서 물김치를 요란스럽게 담그고, 찌개를 끓이고, 아픈 손주를 위해 직접 음식을 해 주겠다며 그 난리를 하는 동안 부엌에서 엄마가 묵묵하게 할매의 잔소리와 비난을 감내해야 했음을 알기에는, 나는 너무 어렸을 거다.
할매는 정말 새끼들 ‘먹이는 일’에 진심이었다. 손주들을 위한 요리를 할 때 할매는, 방에 앉아 악다구니를 할 때와는 전혀 다른 가면을 쓴 것처럼 보였다. 할매의 욕지거리를 들으며 자라 그 결핍의 상흔이 못내 남아있는 아빠와 삼촌들도, “엄마, 맥이는 거 하나는 열심이었제.” 중얼거리며 할매를 추억하는 것을 자주 보곤 했다. “난 욕하는 엄마가 정말 싫었어.”라고 하면서도, 당신들을 그나마 이렇게 키운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나는 어렴풋이 느끼곤 했다. 나 역시 엄마를 힘들게 하는 할매가 미울 때가 많았으면서도, 끝내 미워만 할 수 없어 괴로웠다. 아픈 나를 위해 열무를 사 와서 담그고 손으로 집은 열무 물김치를 내 입에 밀어 넣던 할매. “한 입만 더 묵자.”하며 나의 입만 간절한 눈빛을 담아 쳐다보고 있던 나의 할매. 할매의 사랑은 언제나 풋내가 났다.
아이들이 아플 때, 보양식을 뚝딱 해 줄 솜씨가 없다는 것. 어릴 때부터 갓 담근 김치의 맛을 모르게 키우고 있다는 것이 못 견디게 작아질 때가 있다. 그래도 아이가 아프고 입맛이 없을 때 푸석한 내 얼굴 따위 상관하지 않고 어디든 집 밖으로 나서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찾고 있는 모습에서 그래도 내 새끼 먹을 것에 진심이었던, 할매의 모습을 본다. 내가 아파도 아이들을 웃으며 안아줄 수 있는 내 모습에서 할매의 뒤편, 늘 조용히 인내하던 우리 엄마의 모습을 본다. 밑바닥까지 끌어낸 그 기운을 먹고 왕성하게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며 그래도 나는 이 아이들 때문에 행복해, 착각하며 산다. 나도 ‘엄마’로 산다. 그 어느 날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어 아이들의 관심에서 멀어질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엄마로 힘껏 산다. 할매의 풋내나는 물김치, 그리고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에야 깨닫는 엄마의 조용한 인내. 그것이 나를 지금의 ‘엄마’로 자라게 한 비밀이었을 것이다.
할매의 방 옆에서 울던 그 매미들, 내가 배 깔고 누워서 듣던 그 매미의 요란한 울음소리를 오늘도 듣는다. 어제도 울었고 내일도 울 것이다. 매미가 엄마, 엄마 한다.
- 2021.2 <할매의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