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전에 보았는데
신발 두 짝
길가에 떨어진 나뭇잎 같던
너무 안타까워 내 손에 올리고 자꾸 보았는데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어
엄마 엄마 외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작은 것으로 온전히 땅을 디딜 생각을 하며
눈물인지 웃음인지가 났는데
왼쪽 오른쪽을 무참하게 전복시키던
너의 용기에 박수를 쳤는데
그 신발 두 짝은 어디로 가 버리고
저만치 큰 운동화가 나타났을까
나 없이도 저 문을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그런 날이 오고야 말았을까
- 2022. 6 <신발 두 짝>
문득 눈 떠보니 열세 살이다. 내 앞에서 오동통한 손가락을 흔들며 "꼬까모자(고깔모자) 에이 오독보독(올록볼록) 삐이" 노래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첫째가 큰 걸 보니 이 눈부신 시절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 걸 알겠어서 둘째 셋째에게는 좀 더 성숙하고 너그러운 엄마가 된다. 어쩔 수 없이 모든 일에서 나의 첫 시도와 경험이 되는 첫째. 첫째의 호된 사춘기 앞에서 나는 워킹맘 시절의 내가 미처 못 준 것들을 떠올린다. 내가 지난날 나의 엄마가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쓸쓸함 때문에 사춘기 시절 외로웠듯이 우리 첫째에게 그런 밤이 있을까 자꾸 마음이 아리고 쓰인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는 게 맞을까 때로 일관성 없이 우왕좌왕하기도 하는, 첫째에게는 영원히 '초보' 엄마다.)
신발장에 나뒹굴고 있는 첫째의 운동화가 문득 마음에 박혔다. 이 상투적인 표현이 쓰기 싫어 잠시 망설였는데, 그 단어 외에는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정말 박. 혔. 다. 며칠 전부터 "넌 왜 이렇게 예쁘니."라는 문장이 내 마음에 맴돌고 있던 참이었다. 예쁘다, 말해 놓고 또 애가 타서 "아까 엄마가 예쁘다 했니? 왜 이렇게 예뻐?" 하면 첫째는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반응하고, 둘째는 "아이, 엄마 아까도 얘기해놓고."라고 종알거렸다. 예쁘다, 애가 탄다. 그 말이 너무 좋아서 어떻게 시나 글에 담을까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그 와중 첫째의 운동화를 본 것이다.
시에 어떻게 이 감정을 담을까. 한 이 주간을 고민하고 브런치에 썼지만 마음에 썩 들지 않아 계속 곱씹었다. 내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고, 나의 문장들인데 내 시가 아닌 것만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완전히 다른 문장이 떠올랐다.
아직 부족하지만 지금의 시가 조금 더 마음에 든다.
너무 예쁜 것은, 때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