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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 Oct 28. 2022

나는 여전히 시인이 되고 싶다

에필로그, 시집 열 권의 무게


국문과를 나왔고, 한 때 작가라는 직업을 동경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작가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취업하고, 결혼하고, 애들 낳고 살다 보니 마흔이 넘었다. 이십여 년 동안 글과는 전혀 무관하게 사는 듯했다.  


어릴 때는 어른들의 불행과 세상의 고통에 예민한 내가 싫었다. 욕쟁이 싸움닭 할머니의 철저한 고독, 엄마의 불행, 아빠 내면의 뿌리 깊은 결핍, 그리고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의 불공정한 처사, 이런 것들이 보이는 내가. 해맑은 아이들 사이, 언제나 어두웠던 내가 너무 억울해서, 그리고 나의 예민한 감각의 원인은 꼭 책인 것만 같아서, 우리 아이들은 어릴 때 너무 많은 책을 읽히지 않아야겠다고 결심한 적도 있다.


그냥 덜 민감했으면,

불행에 적당히 눈감고 세상의 불의도 적당히 모르고

그렇게 중간 정도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생각하기도 했다.


가끔 머릿속에 떠도는 문장들이 있기는 했지만 글을 쓰는 순간 나의 고통을 마주하게 될 것 같아 겁났다. 이야기를 꺼내 놓으면 다시 불행해질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불의를 보았던 순간, 글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신랑은 ‘당신의 목소리’라는 나의 첫 시가, 최근의 나의 시보다 훨씬 수준이 낮다며 책에 싣는 것을 반대했지만 나는 그 시를 포기할 수 없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들끓던 언어들이 터져버린 첫 시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눈에는 유치한 시라도, 나의 시심을 다시 일깨워준 말 그대로의 ‘시’다.


작가를 결심한 뒤, 열심히 썼다. 세 아이를 키우고 있는 내 상황에서는 최선을 다했다. 아이 재우고 등 돌리고 휴대폰에 작성하고, 그러다 안 되면 살그머니 나와 노트북을 켰고, 밥 짓다가 노트에 생각나는 문장들 정신없이 받아썼다. 국문과 공부를 하던 이십여 년 전보다 훨씬 많은 글을 쓴 것 같다. 내 인생 이렇게 많이 토해낸 적이 없다. 그런데 그렇게 토해내다 보니 글을 쓰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내면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가는 것이, 어쩌면 정말로 행복해지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모두 잠든 새벽, 흰 화면에 점점이 박힌 나의 서툰 언어들을 바라보며 정말 행복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안다. 나의 내면의 결핍, 유년 시절의 외로움과 쓸쓸한 청춘의 기억, 그리고 외로운 어린아이가 빠져 있던 수많은 책들은

결국 내게 시를 소망하고, 세상을 아파할 줄 아는 시인의 눈을 주었다는 것을.


가난하지만 해맑고 행복했던 아이들,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이지만 로움을

알아버린 아이들,

삶의 이유도 잊은 채 일에 묻혀 살거나, 불륜에 빠진 가련하고 외로운 영혼들.

퇴사 후에도, 그들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핏덩이였던 아기가 내 젖을 먹고 날마다 포동포동 살이 오르고

시든 엄마도 좋다고 팔랑팔랑 내 앞을 뛰어갈 때

매일 아프던 아이가 어느덧 커서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가 되었을 때

무력하게 넘겨지는 달력을 보며 껴지는

그 쓸쓸하고도 눈물 나는 감정을 숨죽이고 바라볼 수 있었다.


엄마 잃은 아이들을 보았을 때,

아픈 아이를 돌보는 파리한 엄마를 마주했을 때,

폐지 줍는 할머니의 굽은 등을 보았을 때,

노쇠해져 가는 동네의 어르신들을 볼 때,

놀이터 엄마들의 숨기어진 눈물이 보일 때,


어여쁜 것 가여운 것 고독한 것 쇠잔한 것…….

그냥 넘겨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모두 시적인 행위가 아니었을까.

불행을 눈감는 것만이 불행해지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시인의 말씀대로,

사람들과 멀어져 본 나는

고독한 사람과 세상의 고통을 마주할 때

시가 쓰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나는 이제는 좋다.

엄마의 삶을, 꽃의 아름다움을, 생의 기쁨과 회의를 글로 표현하고 싶어진 내 마음이 좋다.


시를 쓰면서 울고, 시를 읽으면서 감동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돈도 안 되고, 탄식뿐인 이 쓸모없는 시가 왜 좋은 거냐고 누가 묻는다면,

시를 읽으며

'외롭고, 높고, 쓸쓸한' 마음이 보는 것이야말로

가치있는 삶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아이들도

세상의 아픔을 알아볼 수 있는 아이로 자라면 좋겠다.

내가 조금 외롭고 힘들더라도

세상의 외롭고, 지친 마음들을 알아볼 줄 아는 사람.

주위의 온도를 느끼고, 타인의 불행에도 예민했으면,

시를 읽으며 아파하고 행복해할 줄 아는 아이로 자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시인이 되고 싶다.






시집 열 권을 내밀었는데

오만 팔천 원이라더군요


아니, 왜요? 물었습니다


서점 직원이 대답했습니다

사십 프로 할인되는 책이 네 권이네요, 오래 안 팔려서요.


아니 그럼 내 시인은 얼마를 받나요?

그는 무슨 소린가 어리둥절해하였습니다


카드기가 드륵, 긁히고

열 권치 시인의 고뇌가 댕강 '디스카운트'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집으로 오는 길


시집 열 권의 무게가,


다만 검은 글자만 종종 박힌

시가 구원이라 여기는 그 어리석은 믿음이


온 세상처럼

내게 와락,

끼쳐 와서


나는 시집이 담긴 가방을

슬그머니 끌어안았습니다



- 2022. 10 <시집 열 권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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