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태어난 곳은 대구시 외곽의 여씨(如氏) 집성촌이다. 당시 대구는 대통령의 고향으로 근대화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도시였으나 지역에 따라 개발 격차가 심했다. 대구 중심가는 빌딩이 솟아 있었어도 도시 끄트머리에서 불과 이삼십 분만 차를 타고 들어가면 어느새 초록의 보리순 물결이 넘실거리는 시골 풍경이 나타나곤 했다. 그중 엄마의 고향은 모두 합해 열 집 남짓, 순박한 여씨 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포도농사를 짓고 있는 '부동'이라는 곳이었다. 엄마는 마을에서 가장 어르신으로 대접받던 외할아버지의 늦둥이 딸로 태어나 귀여움도 많이 받았고 학교에서 공부도 잘했지만 외할아버지는 딸들을 중학교 이상 공부시킬 생각이 없었다.
어느 날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겠다는 열여섯 제자의 이야기를 들은 엄마의 중학교 담임이 할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직접 엄마의 집으로 찾아왔다. 빛이 바랜 철 지난 두루마기를 입고도 상투만큼이나 우뚝하고 고집스러운 표정의 할아버지가 선생님을 맞았다. 사춘기가 한창이었던 엄마는 선생님이 입은 양복이 시골집 마당 흙먼지에 더러워질까 안절부절못했고, 혹시 오줌이 마렵다고 하면 흙구덩이 위에 나무토막만 덩그러니 놓인 뒷간을 안내할 수 없어 어떡해야 하나 걱정했다. 엄마는 사랑방에 귀를 바짝 대고 할아버지와 선생님의 대화를 들으려 애썼지만 들리는 것은 곰방대 두드리는 소리와 할아버지의 밭은기침 소리뿐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이 돌아간 뒤 읍내로 나갔다 술이 얼큰해져 돌아오신 외할아버지는 비로소 엄마의 진학을 허락했다. 엄마는 그렇게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쁜, 마을의 자랑거리였다. 부동 달덩이. 엄마의 그 시절 별명이었다.
마을의 뭍 남학생들을 설레게 했던, 숱 많은 검은 머리를 귀 밑으로 굵게 땋아 내렸던 꿈 많던 여학생은 학교를 졸업하고 농협 아가씨가 되었다. 꽤 인기 많은 규수였던 엄마가 왜 하필 동생이 셋이나 딸린, 홀어머니 밑 가난한 장남의 사탕발림에 넘어갔는지, 지금도 엄마는 두고두고 후회하지만 인연이라는 것은 우리가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일이다. 할머니가 하시던 밥 짓는 일, 막내 고모가 하던 밥상 차리는 일, 그리고 큰삼촌이 하던 연탄불 가는 일은 모두 엄마에게 자연스럽게 떠넘겨졌다. 엄마는 "일하는 소 한 마리"가 된 기분이었다고 당신의 시집살이를 회상했다.
그럼에도 매 끼니 식은 밥을 먹었던 기억이 없다. 푸짐한 제철 반찬에 김이 오르는 갓 지은 밥, 그리고 밥상을 물리기 전 늘 당연한 듯 뜨거운 숭늉을 마셨다. 화투에 빠져있던 할머니도, 사춘기를 지나던 고모도, 게을렀던 삼촌들도 누구 하나 엄마를 도왔던 기억은 없다. 나 역시 할머니 방에서 텔레비전 앞에 뒹굴고 있다가 어머니 식사하세요, 소리가 들리면 느릿느릿 기어나갔다. 밥상에 놓여 있던 밥과 반찬과 국과 여덟 벌의 수저. 그 상을 차리기 위해서는 엄마 혼자 몇 번을 종종걸음 했을지, 시집와서 아이를 낳고 나서야 깨달았다. 매일 매 끼니 숟가락과 젓가락을 짝 맞춰 놓으며 엄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얌체처럼 밥만 먹고 모두 자리를 뜨고 난 뒤에나 남은 밥을 먹고 있던 엄마. 늘 설거지를 하며 서 있던 엄마. 나는 엄마의 얼굴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가장 끔찍한 일은 내가 열여덟이 될 때까지 했던 서른 번의 이사다. 아빠는 밑천 없는 집장사를 했고, 아빠가 집을 짓자마자 들어가 살다가, 집이 팔리면 시멘트 냄새가 가시기도 전에 또 새 집으로 떠났다. 이삿짐을 싸는 것 또한 오롯이 엄마의 몫이었다. 나 역시 도운 기억이 없다. 포장이사라는 것도 없던 시절, 여덟 식구 끼니를 챙겨가며 엄마는 혼자서 모든 일을 해냈다. 엄마는 지금도 무거운 가구를 여자의 힘으로 옮길 수 있는 모든 노하우를 알고 있다. 이삿짐을 서른 번이나 쌌다가 풀며 엄마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나는 그 역시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 엄마는, 시골의 순박한 처녀였던 엄마는 아마 우리 모르게 많이 울었을 것이다.
열 살 즈음 엄마의 우는 모습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봤다. 시어머니, 그러니까 나의 할머니에게 몇 시간이 넘게 폭언을 들은 날이었다. 베란다로 몸을 피해 바들바들 떨고 있던 엄마가 눈물 젖은 눈으로 그렇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 집에 보내도고. 나 우리 집에 갈란다…….” 정말 엄마가 떠날 까 봐 무서웠다. 엄마가 마음 터놓을 사람이 딸인 나뿐이었을 텐데, 엄마도 '엄마의 엄마'에게 가라고 해주고 등 떠밀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엄마 손목을 그러잡고 “엄마 그러지 마. 엄마 가지 마아.” 했다. 그날 밤 엄마가 죽는 꿈을 꿨다. 징징 울며 깨어났는데, 여느 때처럼 압력솥 돌아가는 소리가 밸밸 들려오고, 밥 짓는 냄새가 났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엄마는 절대 울지 않았다. 할머니의 폭언에도 천연덕스럽게 받아칠 수 있는 억센 며느리가 되어 갔고, 게으른 삼촌 둘과 막내 고모 사람 만들어 시집 장가 다 보냈다. 아빠가 뇌물 공여로 구속되어 검찰 조사를 받았을 때도 엄마의 옥바라지는 눈물겹다기보다, 자연스럽고 당찼다. 근근이 꾸려오던 아빠의 회사가 폭삭 무너져 내렸을 때도 엄마는 아빠보다 더 강인해 보였다. 살던 집에서 쫓겨나 찜질방 신세를 지고 있을 때도, 엄마는 웃으며 “찜질방이 더 뜨시고 좋네! 밥 안 해도 되니 얼마나 좋냐!”했다. 아빠의 몇 차례의 외도에도 우리에게 내색하지 않고, 엄마 집으로 가지도 않았다. 그리고 엄마의 눈물은, 그렇게 속으로 삭여왔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때문에.
이제 일흔을 바라보는 엄마가 악몽을 자주 꾸신다. 친정에 와서 엄마 옆에 자는 날, 엄마가 손사래를 휘휘 치며 꿈속의 무엇인가를 무서워하는 엄마를 본다. 깨어나신 엄마는 아무것도 기억 못 하고 웃으시지만 응어리를 누르고 살아야 했던 것이 아닌지, 엄마의 가슴 깊숙한 곳이 나도 너무 아프다. 그럼에도 아직도 엄마가 훌쩍 떠날까 봐 무섭다. 열 살 철없던 딸이 아직도 그대로 못 자란 것 같다. 엄마를 아직도 편안하게 해주지 못하는 못난 딸자식인 내가 너무 한스럽다. 엄마에 대한 에세이를 쓰는 일은 너무 어려웠다. 엄마의 인생을 두 어 페이지로 요약할 수가 없었다. 소설로 써 보겠다고 시작하고 나서야 겨우 한 장면을 그릴 수 있었다. 그리고 에세이는 여전히 너무 형편없다. 결국 나는, 또 시 속으로 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