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날, 추운 날 가릴 것 없이 정장과 셔츠만 찾던 제가 언젠가부터 편한 운동화와 티셔츠를 찾게 되곤 합니다. 예전에는 중요하다 싶고 꽤나 고민했던 일들이 돌이켜보면 하찮은 것 같고,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종종 어렵다고 느낀 일이라 느껴 치열하게 덤벼댔던 것들이 지금은 이불 킥하며 후회하고 술을 마시며 웃게 되는, 그런 쓸데없는 일이 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눈물 나게 힘겹고 어렵던 시절이라고 여기면서,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한 발자국 내디디기 어려워하다 흔들리기를 몇 번, 그러다 어느새 습관처럼 '망각'을 하고 맙니다.
기억 속의 행복과 불행이 교차되는 인생에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완전한 성공도 실패도 없기 때문에, 그래서 불행과 행복은 동전의 양면이 아니라 매듭처럼 묶인 인생이라고 믿으며 불행보다는 행복이 빨리 잊히는 현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나에게 찾아온 잠깐의 행복을 즐기기보다는 언제 올지 모르는 불행을 대비하기 위한 시간을 보내기에 바빴던 것 같습니다.
인생이 쉽다고 느낀 적은 없었지만, 바쁘게 살아갈수록 정말 어려운 일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만큼, 인생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인생에서 만나는 이 끝없이 험준한 산을 오를 생각을 하면, 막막하더라도 땅만 보고 걷고 또 걷다가, 눈앞의 장애물을 넘고 또 눈을 들어보면 정상이 앞에 있을 거라고 기대합니다.
앞서가는 사람이 밟은 돌을 뒤따라 밟기를 몇 번,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기를 몇 번, 중심축이 흔들려 넘어지기를 반복하다 결국 정상에 오르고 난 후 느끼는 쾌감과 감동.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는 하나의 기억이지만 그마저도 '기억'이라는 보관함에 넣어둔 사진처럼 다른 것에 섞여 들어갑니다.
누구나 행복 혹은 불행을 습관처럼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다가오지도 않은 불행의 그늘을 피해 다니기 바쁘고 실패의 감정을 두려워하며 정작 다가올 행복의 햇빛마저 피해버리고 맙니다. 지난날에 흘려보낸 걱정들을 다시 마주하기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걱정을 맞이하며 꾸역꾸역 견뎌내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기분이 바닥을 쳐 울먹일 수도, 밝은 척을 하면서 감추기도, 쓸데없이 속이 깊어 속으로 앓는 사람도 있습니다. 각자 다른 기억과 감정의 모양을 가진 사람들은 각자의 희극과 비극이 있지만 사회 속에서 서로에게 맞춰나가는 연습을 하며 스스로를 다독입니다.
저마다의 사연이라는 사진을 정리하는 전문가들은, 서로의 동선을 방해하지 않도록 자신만의 보금자리를 기억과 감정들로 채워나가죠. 찰나의 순간을 간직한 사진들로 가득 찬 공간 속에서, 불필요하게 자리를 차지하는 것들을 치워나가며 자신이 포착한 삶만을 담기로 결정합니다. 담을 수 있는 공간의 총량이 있기 때문에 감정 속 은밀한 내용까지 모두 담지 못하고 망각을 선택하게 되죠.
하루하루 담아내야 하는 많은 일상에서 짤막한 순간이 하찮을 때가 있습니다. 아프고 힘들었던 날의 기억, 혼자 겪어야 했던 외로움과 슬픔, 어린 시절에 겪은 일들까지, 모두 지나간 일이라고 느끼기 이전에 아직도 지금 진심을 다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 나만이 혼자 힘든 것이 아니라는 것에 잠시 안도감을 가져봅니다. 머리를 처박고 이러다 죽겠다 싶은 것도 있지만, 고개를 쳐들고 애쓰기 때문에 세상에 불행 하나 없이 행복만 충만하게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누구나 가슴속으로 앓는 병은 하나쯤 있을 테니까.
괜찮은 어른이라는 게 어떤 것일지 아직 알지 못하면서, 아직 어린아이처럼 스스로의 인생을 비루한 인생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면 잠시의 망각을 실천하는 게 어떨까요. 자신의 보금자리에 '불행'이라는 사진을 접고 '추억'이라는 감정을 한 움큼씩 더해보는 연습을 해봅니다. 험난한 인생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그곳이 가시밭길이 아니라면 다시 일어설 수 있으니까, 그런 쓸데없는 믿음에 마음을 맡기며 오늘도 위태롭게 흔들리는 삶을 지탱해나가는 연습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