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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음 Mar 23. 2022

공중전화 부스에서 듣는 메아리

내 지나온 세상과 나와 함께 한 모든 것들


     마트에 다녀오다 보았다. 가만히, 말없이 서 있는 공중전화 부스를. 늘 거기, 아파트 관리사무소 옆에 서 있었을 텐데, 오늘 불현듯 내 눈 속으로 걸어 들어온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일까.  가벼운 내 발걸음 앞으로 툭 던져지듯 튀어나온 공중전화 부스가 잊고 지냈던 옛 애인을 만난 것처럼 아련해지고, 갑자기 심장을 바늘로 찔린 듯한 통증으로 온몸이 찌릿하다. 


      곧 울음을 터뜨릴 아이처럼 잔뜩 찌푸린 하늘이지만, 봄은 오고 있다. 살랑살랑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의 입맞춤에서, 보랏빛 앙증맞은 풀꽃의 작은 꽃잎에서 봄이 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아파트 화단의 목련나무에서 흰 목련의 부리가 하늘문을 두드리는 조용한 속삭임도 들린다. 사방에 봄 향기가 그득하다.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 두고 왔는데, 더 멀리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 마음을 다독이며 간단하게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 공중전화 부스가 나를 맞아주었다. 밖이 훤히 보이는 유리창 안에서 수화기를 놓아두고 누군가를 오래오래 기다렸을, 언제나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기다리는 공중전화 부스. 한 번 들어와 보라고. 들어와서 누군가에게, 그리운 사람에게로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러보라고 속삭였다.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수화기를 들고 숫자를 꾹꾹 눌러 전화하지 않는다. 사람들 손에는 휴대전화가 있다. 휴대전화가 생기기 전, 공중전화 부스는 사람들을 이어주고, 급한 소식을 전하고 그리운 사람에게 사랑을 전해주는 역할을 톡톡히 담당했었다. 공중전화 문 밖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은 누구랑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궁금했었다. 수화기를 붙들고 우는 사람을 보면 애인과 헤어졌을 거라 지레짐작했고, 문을 밀고 나오면서 눈물을 훔치는 사람을 보고는 틀림없이 엄마와 통화를 했을 거라고, 내 가슴도 같이 먹먹해지곤 했다. 


     나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누구하고 통화를 했을까? 내게 그리운 사람은 누구였던가. 고등학교 때는 가족과 떨어져 지냈는데, 엄마가 늘 그리웠다. 그러나 전화를 하지는 않았다. 힘든 내 생활을 엄마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늘 잘 지내는 딸, 그래서 엄마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넷째 딸이어야 했다. 엄마는 내가 아니고서도 걱정할 일들이, 힘들 일들이 태산 같이 많았다. 거기다 ‘나’라는 짐을 보탤 수는 없었다. 공중전화 부스는 내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다가가서는 안 되는 살아 있는 그 무엇이었다. 수화기를 드는 순간,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을 듯싶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것을 미연에 방지해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간 후에는 공중전화 부스는 까맣게 잊고 살았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열아홉 살이었다. 내 앞에 놓인 길에서, 나는 나 자신조차 주체하지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거기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남동생과 자취를 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도시락 8개를 쌌던 고등학교 시절에 비하면 동생의 도시락 두 개를 싸주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직장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돈을 다루고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너무나, 정말이지 너무나 힘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마셔대는 술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술을 참 빨리도 배웠다. 힘들 때, 죽고 싶어서 마신 술이었던 탓에 술버릇이 나빴다. 빈 속에 마셨던 술은 매번 빨리 취했고, 술을 마시면 매번 울었으니까. 꽤 오랜 세월 동안을. 그렇지만 취중에도 공중전화에 매달린 적은 없었다.


      나에게 공중전화는 하나의 사물, 이 지상에 왔다가 사라지는 한 목숨처럼,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으므로. 오직 내 눈앞에 보이는 거라고는 바닷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결코 빠져나오지도, 빠져 죽지도 못하고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물을 숨도 쉬지 못하고 꿀꺽꿀꺽 삼키고 있는, 처참한 나만이 있을 뿐이었다. 


     삐삐가 나왔다 사라지고 휴대전화가 차차 편리한 생활의 도구가 되고 스마트폰 하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세상이 만들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타고 나도 나이를 먹어 갔다. 내가 공중전화 부스에 의미를 갖기 시작한 것은 몇 년 되지 않았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더 하겠다고 할 때, 김경주 시인의 시 <꽃 피는 공중전화>를 만나고 난 후였다. 가발공장 여공들이 ‘밤새도록 미싱 아래서 가위, 바위, 보/ 순서를 정한 통화 한 송이씩 피었다 진다.’는 공중전화 한 통이 꽃으로 피었다 지는 아름답고도 가슴 아픈 꽃을 보고서, 수화기에 피어난 꽃이 내 마음에도 피어났다. 


     그 후로는 수업을 듣기 위해 가는 교정에 서 있는 공중전화 부스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어느 날은 들어가 보기도 했고, 한 번은 들어가서 수화기를 들고 숫자를 꾹꾹 눌러보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날은 동전을 넣고 남편의 휴대전화에 전화를 걸어 통화하기도 했다. 이제 주변에서 거의 사라져 자취를 감춘, 어쩌다 만나는, 잘 만날 수 없는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서성거리는 나를, 쉽게 발을 떼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오랜 세월 우리들 곁에서 어느 도시를 가든지 한 자리에 서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그리운 이에게, 사랑하는 이에게 목소리를 들려주고 들려주었던 공중전화 부스가, 더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았으면, 숫자를 꾹꾹 누르지 않기를 바랐을 공중전화 부스가, 이제는 사람들이 들어와 수화기를 들고 그리운 이에게 목소리를 들려주기를 간절하게 기다린다. 길 잃은 고양이가 잠시 쉬었다 가는 공간이 아니라 따뜻한 사람의 체온이 그리운 공중전화 부스가 수줍은 듯 서 있다. 


     나를 부른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 수화기를 들어본다. 띠, 띠, 띠 신호음이 울리고 무작정 아무 번호나 누른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국번이오니 확인하시고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는 기계음이 나올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수화기를 들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동전이나 카드를 넣어주세요.’라는 기계음이 우리말과 영어로 나오고 번호를 눌러도 똑같은 말을 반복하기만 할 뿐, 숫자가 눌러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잠시 세상을 뒤로하고 수화기를 움켜쥐고 저 멀리 피안의 세상으로 무전을 보낸다. 공중전화 부스가 나를 지켜주고 내 몸을 감싸준다. 이 안에서만큼은 두려울 것 없이 보호받는 아늑한 기분에 휩싸인다.


      ‘나를 지켜줘서 고마워!,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흐린 하늘에서 빗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진다. 공중전화 부스 유리창에 빗방울이 듣는다. 비를 피해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뛰어 들어갔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집을 향해 달려가야 할 때다. 가스레인지에서 국물이 쫄아들고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내 가족이 기다리고 있다. 뛰자. 공중전화 부스가 웃는다. 손을 흔들어 준다. 나도 손을 흔든다.  


     가슴이 텅 빈 듯 허전한 날, 공중전화 부스를 찾아 들어가 숫자를 누르고 어딘지 모를 다른 세상에 접신할 것이다. 잊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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