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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시간]-느린 우체통

내 마음의 발신인

by 무지개바다


KakaoTalk_20250618_112108942_01.jpg 안목해변에 귀엽게 서있는 느린 우체통

어릴 적, 동네 곳곳엔 빨간 우체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학교 앞 문방구 옆에도 있었고, 버스 정류장 옆에도 있었고, 심지어는 아무것도 없는 골목 어귀에 멋쩍게 서 있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그 우체통 안이 궁금해서 날개처럼 왔다 갔다 하던 입구를 들쳐 안을 들여다보곤 했었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꾹꾹 눌러쓴 글씨, 그 마음이 그대로 봉투 안에 들어있었겠지.

그 시절엔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썼던 것 같다.

지금처럼 바쁘게 움직이는 시간이 아니라 여유롭고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을 살았다.

연필로 삐뚤빼뚤 적었던 아주 어린 시절, 좋아하는 캐릭터 편지지에 스티커를 붙이고 친구들에게 그리고 짝사랑하던 남자아이에게 적었던 사춘기시절에도 그리고 군대 가있던 남자친구에게까지..


편지봉투를 접을 때마다 마치 내 마음도 조심스레 포개지는 설컹설컹하게 어설펐지만 내 편지를 보고 좋아하고 기뻐할 누군가를 생각하며 참 순수했던 시절도 분명 있었다.

그들의 마음속에 내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것들도 있고, 흩어져 사라진 말들도 있겠지.



답장의 기다림은 그때의 특권이자, 설렘의 다른 이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쉽게 말이 닿는 시대다.

한 줄 안부도, 사진도, 마음도 이젠 모두 ‘전송’ 버튼 하나로 끝난다.
답장이 몇 초 늦으면 걱정하거나, 확인했다는 카톡 선 하나로 마음이 바뀌기도 한다.
이제는 누군가를 오래 기다릴 이유도, 그럴 여유도 점점 사라져 간다.


‘느림의 미학’은 그렇게, 어느새 우리 곁에서 멀어졌다.


나는 요즘 누구에게도

‘기다림’을 선물하지 않았구나.
심지어 나 자신에게조차도.





바닷가에 덩그러니 서있는 우체통을 산책할 때마다 마주했다.

에메랄드 바다와 동그란 눈이 달린 새빨간 우체통은 볼을 꼬집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엽다.

언젠가 엽서를 써서 넣어야지..라는 생각만 오랫동안 갖고 있었는데.

오늘 산책길에 세장의 엽서를 써서 들고나갔다.

수신인은 없다.


오늘의 하늘빛과 바람의 냄새를 함께 담아 우체통에 고이 넣은 세장의 엽서.


“그때의 너는 잘 지내고 있기를"


답장이 없는 편지는
그래서 더 특별한 것 같다.
기대하지 않기에, 온전히 주는 마음이기에.



나는 여전히 ‘기다림’을 잘 못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아무런 대가 없이 마음을 건네는 연습을 해보기로 한다.

언젠가 그 마음이 돌고 돌아

지금의 나에게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햇살이 유난히 좋은 어느 날처럼.



KakaoTalk_20250618_112108942_04.jpg 송정숲길 바다를 바라보는 벤치



마음에 작은 우체통 하나 놓아보는 건 어떨까?

... 우체통 편지를 수거하시는 분이 읽어보고 웃으시면 곤란한데..... 찢어버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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