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그림자
아직까지도 나는 종종 기정에 대해 생각한다. 그럴 때마다 빛과 그림자가 양분된 세계에서 경계선의 한 가운데 서 있는 그애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기정에게는 선명하게 구분되는 두 가지 태도가 있었다. 잘못에 대한 책임을 결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뻔뻔함과 인정과 애정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나는 그런 기정을 온전히 미워하지도 수용하지도 못한 채 혼란스러운 감정을 소용돌이처럼 키웠다. 마음이 무너져내린 순간까지도.
기정의 어머니와 통화를 마친 다음부터 나는 기정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관심을 갖고 살피자 의외로 괜찮은 구석이 적지 않았다. 교실 청소를 누구보다도 확실히 했고, 복도에서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싹싹하게 인사를 건네곤 했다. 그런 모습들을 놓치지 않고 칭찬해주었다.
감사합니다! 칭찬을 받으면 기정은 쑥스럽다는 듯이 나를 향해 씩 웃어 보이며 귓불을 붉혔다. 또래의 여느 남학생들과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얼마 뒤 기정은 학생부에서 교외흡연 건으로 징계를 받게 됐다. 조회 시간 즈음에 학교 인근 골목에서 고등학생 대여섯 명이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다는 주민의 신고를 받은 것이었다. 그날 기정은 1교시 수업 도중에 교실에 들어왔다. 담배의 출처는 몇 년 전에 K고를 자퇴한 아무개가 기거하는 원룸이었다.
“같이 어울리는 형들 가운데 한 명은 한 달 전에 소년원에서 나왔어요.”
“정말? 어쩌다 소년원에 갔는데?”
“절도죄요. 근데 지금은 마음을 잡고 치킨 집에서 배달 일을 하고 있어요.”
“그렇구나.”
정말로 마음을 잡았다면 거기에 있지 않겠지. 나는 속으로 냉소했지만, 그들이 방 안에서 어떤 일들을 벌이는지에 관해서는 묻지 않고 덮어두었다. 어차피 현실에서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부분 따위는 없을 테니 차라리 모른 체하고 싶었다.
학생부에서는 기정에게 사흘 간 정학 처분을 내렸다. 1학년 때부터 받아온 징계 기록이 누적된 결과였다.
“선생님, 실망시켜드려 죄송합니다.”
기정이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래, 실수할 수 있어. 나는 아직 너를 신뢰해. 하지만 같은 일이 반복되면, 더는 너에게 믿음을 갖기가 어려워질 거야. 어머니께서도 많이 걱정하시잖아. 함께 노력해보자.”
사실 내 입에서 흘러나온 언어는 기정을 향한 격려라기보다는 온화한 투로 내뱉는 협박에 훨씬 더 가까웠다. 한 사람의 습관이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의식하면서도 나는 그 말을 스스럼없이 했다.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을 생각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날 밤 기정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소 무거운 심정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는데 의외로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가 달가웠다.
“선생님, 마침 제가 오늘 일을 쉬는 날이어서 조금 전까지 기정이와 진지하게 대화를 해봤는데요. 애가 마음을 다잡고, 제대로 학교를 다녀보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앞으로 당분간은 제가 는 매일 아침마다 기정이를 차로 데려다주기로 했어요.”
“아, 정말요? 기정이가 그런 말을 했다니 저도 기쁘네요. 매일 태워주시는 건 어머님께서도 피곤하실 텐데……. 그래도 아이 입장에서는 어머니의 관심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죠?”
그녀는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나 역시도 기정에 대한 감정이 희망으로 채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정이 돌아온 뒤로 한동안 평온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선생님, 실은 저한테 꿈이 있어요.”
“뭔데?”
“지금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중이잖아요. 사장님에게 제대로 일을 배우고, 돈을 부지런히 모아서 나중에 제가 직접 식당을 차릴 거예요.”
1학기 중간고사를 마치고 교무실에서 기정과 진로 상담을 하던 중에 나온 얘기였다. 기정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방과후에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꾸준히 이어 오고 있었다. 같이 어울린 무리들은 2,3개월 만에 가게에서 잘리거나 제풀에 나가떨어진 것과 달리 사장님에게 제법 인정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장님은 어떤 분이셔?”
내 질문에 기정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저를 믿어주는 분이에요.”
“좋은 분을 만났나 보네. 다행이다.”
기정의 입가에 자연스레 편안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기정의 모습이 기특해서 이번에야 말로 진심을 담아서 그애를 격려해주었다.
“너는 싹싹하고 성실한 면이 장점이니까, 잘 할 수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기정이 넉살 좋게 웃으며 꾸벅 인사를 했다. 그 시간이 나에게는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았다.
한 달 뒤에 기정은 또 다시 담배 건으로 징계를 받게 됐다. 이번에는 교내 흡연이었다. 처음에는 징계 대상 명단에 기정의 이름이 빠져 있다는 데 안도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복도를 지나다 기정과 마주쳤다.
“기정아, 이번에 담배로 걸린 애들 안에 네가 없더라.”
“에이, 조심해야죠. 근데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
기정은 살가운 표정을 유지한 채로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사실은 이번에 걸린 애들에게 제가 담배를 사다 줬어요.”
“뭐라고?”
생각지도 못한 기정의 고백에 나는 뒤통수가 얼얼해진 채로 기정을 쳐다봤다. 기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하나 더 말씀 드리면 이번에 걸린 애들 말고 저희 반에 두 명이 더 있어요.”
“그게 누군데?”
“재훈이랑 석진이요.”
그렇구나. 나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의문이 내 안에 걸려 있었다.
“근데 이제 와서 왜 나한테 굳이 그 얘길 하는 거야?”
기정은 내게서 그 질문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저는 징계 대상에서 빼 주시는 거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눈이 크게 떠졌다. 얘가 지금 나랑 거래를 하자는 건가? 자연스레 언성이 높아졌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담배를 사다 주는 거나 피우는 거나 별반 다를 바 없는 행위잖아. 솔직하게 말해준 건 좋은데, 네가 무리에 가담한 게 맞다고 밝힌 이상 너만 책임을 면해줄 수는 없지.”
마지막 말에 기정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제 입장에서는 말을 안 해도 상관이 없는 거였잖아요. 그런데도 사실대로 말씀드렸는데, 다른 애들이랑 같이 징계를 받아야 한다구요?”
“당연하지. 대체 학교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기정을 쏘아보며 항변을 일축했다.
“아악!”
기정은 분을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괴성을 내질렀다. 그러더니 씨발, 하고 욕설을 내뱉으며 교실 안으로 사라졌다. 나 역시 교무실로 돌아간 뒤에도 한숨을 쉬며 분을 삭였다.
대체 나는 얘한테서 뭘 기대한 거지? 기정에 대한 실망감에 몹시 화가 났다.
결국 1학기가 끝나기 전에 기정은 전과 같이 사흘 동안 정학 처분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