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 한 번 만나요.

빈말인 듯 빈말 아닌 그 말. 20240425

by 축복이야


내가 좋아하는 J는 빈말을 하지 않는다.

항상 예의 있고 진중하게 사람을 대한다.

보통 사람들이 '언제 차 한잔 해요.'라는 말이나

'담에 만나요.'라는 말에도 신경을 쓴다.


동네에 서글서글한 엄마가 있는데

보는 사람에게 인사도 잘하고 말도 잘 건넨다.

J와 내가 함께 있을 때면 종종 '나도 같이 해요.'라고 말한다.

그럼 나는 그래요. 하고 웃으며 답한다.

나는 그게 인사치레라는 생각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J는 못 내 마음이 쓰이나 보다.

그런 말을 몇 번 듣고는 '우리 다음에는 함께 할까요?'라고 J가 묻길래 그러자고 했다.

정작 J가 먼저 연락을 하자 서글맘은

그날 선약이 있다거나, 일이 있거나 해서 계속 어긋났다.

"거 봐, 그냥 할 말이 없으니 한 거라니까. 큰 의미 안 둬도 될 거 같아."

마음이 있는 사람은 말만 하지 않고 약속을 그 자리서 잡던지

언제가 좋냐며 먼저 물어보거나

더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이 당연하니까.


J에게는 그런 지인이 한 명 더 있다.

J의 일정과는 맞지 않아 약속 잡기가 쉽지 않았다.

외향적인 지인은 다른 약속들도 줄줄이 있으면서 J와의 시간도 욕심내고 있었다.

빈 말 같은 언제 한 번 보자만 계속되고 있던 중인데

꼭 나와 함께 있을 때 그 지인과 종종 마주쳤다.

우린 따로 약속을 잡지 않아도 같은 아파트에 아이들 등원 시간이 같으니 전투적인 하루를 보내기 전 함께 한다.

짧은 여유와 자유의 귀한 시간인데 J는 어쩔 줄 모르고 난감해하느라 제대로 여유롭지 못했다.

내가 괜히 자기만 안 만나는 줄 오해하겠다. 어쩌지.

'나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고 싶어서 그런 빈 말은 하고 싶지 않아요.' J가 조용히 말했다.

순간 그 말 한마디가 마음에 앉았다.


나도 아예 마음에 없는 소리는 아니지만 그런 인사치레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상황도 어떤지도 모르니, 섣불리 그 자리서 언제 봐요~는 어렵다.

친구나 지인들의 약속도 내가 먼저 '언제 보자.'가 아니라

상대방이 항상 제안을 하면 수긍하는 편인 것을 그제야 알았다.

약속을 잡는 것에 대해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늘 먼저 다가와 주니까.

늘 나는 가자. 보자. 하자. 즉흥적 제안을 하면 체계적으로 계획을 세워 날짜를

잡는 사람은 항상 따로 있었기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모임에서 알게 된 엄마가 있는데 반갑게 인사하고 편하게 대화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친분이 깊지는 않다.

서로가 담에 차마셔요~라는 인사를 했는데 순간 내 마음에 앉아있던 J의 말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빈 말인지 참말인지 모를 말에

내가 진짜 약속을 잡으면 서로 난감할까

거기다 나와는 열 살은 넘게 차이가 났던 것 같은데?

80년대생 이후는 들어도 머릿속에 나이가 잘 계산이 되질 않는다.

여하튼 젊은 엄마에게 내가 괜히 부담스러운 건 아닐까?

잠시 고민했지만 휴대폰을 꺼내 날짜를 잡았다.

다음 주 화요일 괜찮아요? 언니~좋아요!!


약속의 날 아침.

대화하다가 mz인 그녀가 부담스럽거나 불편한 기색이라도 있음 편히 보내줘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우리의 시간은 길어야 한 시간쯤이겠지 싶었는데.

웬걸 얘기하다 보니 2시간이 지나있었다.

어여 그녀를 보내주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점심도 함께 했다.

초1의 하교시간 12시 45분.

아이가 등교하고 9시부터 3시간 반이 순식간에 지났다.

그 귀한 오전 시간을 함께 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고는 저녁쯤에 카톡이 왔다.

예쁜 브런치 카페사진 밑에는 우리 담에는 요기 갈까요?

어머나! 대화가 너무 잘 통해서 즐거웠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나 보다.

나도 좋다고 답을 보내며 이번에도 날짜를 먼저 제안했다.

그렇게 우리는 또 2주 뒤 약속을 잡았다.


이 얘기를 J에게 했다.

네가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전에 했던 그 말이 마음에 남았어.

나도 매번 다음에 한번 만나요 말만 하다가

너의 말이 떠올라 먼저 제안을 했고 이런 시간을 보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나의 J는 마음씨도 곱고 바르지.

"언니의 마음을 알아주고 그렇게 잘 보냈다니

그분도 너무 고맙다.

역시 언니가 편하게 사람을 대하니까 그런가 봐."

그러고 잘하지도 못하는 인사치레도 살짝 던져준다.

맘에 있지만 섣불리 해보지 못했던 일.

괜찮다.

다음에 또 마음을 열 누군가가 있으면

빈말처럼 여기지 않게 바로 휴대폰을 열어야지.

그러고는 달력을 보며 약속을 바로 잡을 거야.

정말 마음에 없는데 한 번 봐요가 튀어나오려면 입을 꼭 막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