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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안 Apr 29. 2023

초여름 편지

  겨우 비가 온다는 핑계만으로 네게 편지를 쓴다. 저 멀리 있는 너의 창문에도 비가 올까. 이제는 어렴풋이 가늠해 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저 멀리 있는 네게, 닿을지도 모르는 비가 온다는 소식을 전하려 편지를 쓴다. 고작 이런 말에도 너는 이 편지를 읽어 줄 테니까.

  너와 내가 좋아하던 겨울은 다 지나고, 어느새 날은 누구도 모르게 봄 지나 여름으로 가고 있더라. 어제는 올해 처음으로 모기를 잡았다. 휴지로 손을 닦으면서, 이런 이야기도 너는 여전히 좋아해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에는 조금씩 스며오는 더위의 탓인지, 많은 것들에서 의미를 놓게 된다. 잘 대하지도 못하는 사람을 대하는 일이나, 이렇게 밤마다 앉아 글을 적는 일들. 크고 작은 문장들은 그래도 오래 버텨 주었는데, 이제는 너무도 오래되어 버린 탓인지 주인을 잃은 개처럼 한 자리를 내내 맴돌고만 있다. 가만히 앉아 기다려도 보고, 컹컹 짖는 듯 밤새 글을 적는 날도 있었는데, 문장들은 주인이었던 사람이 너무 멀리 가버린 탓에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된 거겠지.


  그래도 탓을 하지는 않으려 한다. 이제는 책임이나 의미 따위를 묻기에도 너무 오래되어 버린 일이니까. 그래도 이번 겨울에는 정말 네가 한 번쯤, 돌아오진 않더라도 한 번쯤 찾아주길 바랐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버린 약속은, 가끔은 이미 지키지 않으리라는 대답을 받아놓은 것만 같음으로 손아귀의 힘을 흐리게 한다. 그래도 손끝에 걸린 네 목소리를 끝내 놓지 못하는 것은, 그 작은 희망이라는 게 그렇잖아. 이미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예 놓아버릴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그 덕에 지날 수 있었던 세 번의 겨울로 고마운 마음을 대신한다. 어쩌면 내가 너의 그 장난스럽던 약속을 잡고 살았던 게 아니라, 너의 그 목소리가 나의 지난한 추위와 밤을 잡아 견디게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 번의 겨울에는 아직도 네 집 지붕에 있을 거라는 너의 첫니를, 또 한 번의 겨울에는 우리가 함께 앉아 볕을 맞았던 계단 한 켠을 태워 온기를 얻었다. 이번 겨울에는 나를 처음 만났던 날, 이상하게도 눈 대신 비가 왔다고 했던 너의 말이 유독 자주 떠올랐다.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었는데, 사랑하려면 무엇으로도 사랑할 수 있었던 그 시선이, 윤슬처럼 떠내려가지도 않은 채로 자주 일렁였다.

  사랑을 더욱 사랑이라 느끼게 했던 너의 슬픔을 나는 아직 붙잡고 있다. 종종 울고 자주 기도하면서. 함께 울어주어서 고맙다던 너의 칭찬을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알 수 없는 마음에 울음과 미소가 함께 튀어나온다. 이제는 아프지 않을까. 이제는 아프지 않아야 할 텐데. 그런 생각들로 가득 차버려서는.
 겨울 내내 이 못난 마음으로 글을 썼다. 아마, 네가 질리지 않느냐고 매번 말했던 그 수많은 퇴고를 지나면 어느 정도 책의 모양을 할 수도 있겠지. 네가 바보 같다며 웃었을 법한 이야기들도 넣고, 보여주고 싶었던 메모들도 붙이고,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한 말들도 조금은 적어 넣었다. 이번에는 네게 닿을 수 있을까. 혹, 저번 언젠가의 글들이 네게 닿은 적도 있었을까.

 궁금하지만 알 수 없는 일들로 요즘은 가득이다. 너에 대해서는 항상 그랬지만, 요즘은 더욱 그렇다. 어쩌면 괜히 이번이 정말 마지막 같기도 해서일까.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 점점 헛되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고 싶은 말들로 다음을 기약하며 편지를 마치려 한다.
이 편지가 부디 마지막은 아니길, 너의 생활에 나의 기도 같은, 충분한 행복이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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