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무한히 계속되는 원주율처럼
전광판 숫자들이 요동쳤다.
세계 금융 시장이 폭락하고 있었다. 뉴욕 증시, 런던 증시, 홍콩 증시 모든 주가 지수가 붕괴하고 있었다. 단 몇 시간 만에 글로벌 시장에서 4조 달러가 사라졌다. 인공지능이 예측할 수 없는 ‘블랙 스완(Black Swan)’이 발생한 것이다.
“변수다…”
최석정은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수학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그는 가장 중요한 공식 하나를 알고 있었다. 시장이 스스로 균형을 찾으리라는 믿음은 언제나 틀렸다는 것. 인간의 탐욕과 공포는 기계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 붕괴는 단순한 시장 변동이 아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누군가, 이 혼란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석정은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코드 한 줄을 추가했다. 그의 퀀트 시스템이 즉시 반응했다. 숫자들이 빠르게 계산되었고, 새로운 패턴이 눈앞에 형성되었다.
비정상적인 패턴. 누군가 알고리즘을 조작하고 있었다.
“AI가 만든 폭락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폭락이군.”
석정의 눈동자가 빛났다.
10시간 전.
“석정아, 너 또 며칠째 집에만 있었지?”
부산 사상구의 작은 아파트. 문 앞에 선 여자가 팔짱을 끼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집이 편해.”
“편한 게 아니라, 은둔자잖아.”
누나는 혀를 찼다. 최석정은 어릴 때부터 이런 말을 자주 들었다. 그는 한 번 빠지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성격이었다. 보통은 수학 문제였고, 가끔은 경제 모델이었다. 오늘도 그는 12시간 동안 하나의 수식에 몰두한 채 노트북 앞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외국으로 가서 연구나 하지,
왜 부산에서 이러고 있어?”
“외국엔 내가 싫어하는 게 많아.”
“뭔데?”
“사람.”
누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좀 나가봐. 오늘 바닷바람이라도 쐬고 와. 네가 요즘 무슨 일 하는지 모르겠지만, 가끔은 네가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사람.
석정은 혼자 있을 때 가장 편안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인간에 대해 누구보다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인간의 심리, 감정, 선택, 오류. 그는 인간이 만든 불완전한 시스템을 연구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그 불완전성을 수학으로 통제하려 했다.
“수학은 완벽하지만, 인간은 불완전해.
그래서 난 숫자로 인간을 이해하는 거야.”
석정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누나는 이해하지 못한 채 한숨을 쉬며 문을 닫고 나갔다.
새벽 2시.
거대한 데이터 흐름이 보였다.
그는 머신러닝 기반 예측 모델을 개발한 적이 있었다. 전 세계 시장 변동을 수학적으로 분석하고, 패턴을 찾아내는 퀀트 모델이었다. 그러나 지금, 시장은 그 어떤 예측 모델도 설명할 수 없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주가 하락, 특정 기업의 집중 매도, 비트코인 폭등, 원유 가격 변동…
모든 것이 하나의 흐름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석정은 단순한 금융 데이터가 아니라 국가 간 정보전의 움직임을 감지했다. 특정 세력들이 금융을 무기로 사용하고 있었다. 주식 시장을 교란시키고, 특정 기업을 흔들어 국가 경제 자체를 조작하는 거대한 흐름.
‘이건 수학이 아니다. 이건 전략이다.’
그는 깨달았다.
이제, 수학자의 싸움이 아니라 전략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석정은 노트북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 창밖으로 부산의 밤바다가 보였다. 어릴 적부터 이곳에서 바닷물을 바라보며 문제를 풀곤 했다. 바다는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늘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원주율처럼.
3.141592… 끝없는 숫자의 연속.
“세상이 변해도, 수학은 변하지 않아.”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세상을 움직이는 건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숫자를 해석하는 인간의 의지라는 것을.
이제, 그는 싸울 준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