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어느 날의 작은 위로
늦겨울의 밤. 계동리는 언제나처럼 따뜻한 조명을 내뿜고 있었다.
바깥에서는 차가운 바람이 불었지만, 가게 안은 온기가 가득했다.
잔잔한 재즈 음악과 함께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졌고, 오늘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이곳을 찾고 있었다.
주인장은 바 뒤에서 조용히 잔을 닦으며, 하나둘 들어오는 손님들을 맞이했다.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들이 들어왔다.
서울대학교병원의 응급의학과 의사 김봉준, 마취과 의사 임수정, 그리고 병동 간호사 유진수였다.
그들은 조용히 자리에 앉더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주인장이 다가와 물었다.
“오늘은 뭘로 드릴까요?”
봉준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위스키로 주세요. 조금 진하게.”
수정과 진수도 각자 맥주와 칵테일을 시켰다.
잔이 채워지고, 그들은 가만히 술을 한 모금씩 마셨다.
“오늘은 힘든 하루였나 보네요.”
주인장이 조용히 물었다.
유진수가 조용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 오늘… 환자 한 명을 잃었어요.”
그 말에 봉준과 수정도 조용해졌다.
응급실에서 환자를 살린 날도 많았지만, 손을 쓸 수 없는 날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날, 그들은 늘 계동리를 찾았다.
봉준이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이곳은 참… 이상하게도, 말하지 않아도 위로가 되는 곳 같아요.”
주인장은 말없이 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그들이 떠날 때까지, 그날 밤의 대화는 길지 않았지만,
그저 같은 공간에서 조용히 머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되었다.
그때,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계동에서 터키 아이스크림 가게를 운영하는 젊은 부부가 들어왔다.
그들은 늘 그렇듯 다정한 모습으로 가게에 들어섰다. 주인장이 웃으며 물었다.
“오늘도 칵테일 드릴까요?”
남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거 주세요. 저번에 만들어주신 거, 정말 맛있었어요.”
부인은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손님이 많네요.”
주인장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이맘때면, 유독 많은 사람들이 위로가 필요하죠.”
그들은 자리에 앉아 칵테일을 한 모금씩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요즘 고민이 있어요.”
남편이 조용히 말했다.
“가게를 조금 더 확장할까 고민 중인데, 걱정이 되네요. 우리가 너무 욕심내는 건 아닐까 싶어서요.”
부인이 남편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좋겠어요.”
주인장은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말했다.
“욕심이 아니라, 꿈이겠죠.”
그 한마디에, 남편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그러네요. 욕심이 아니라, 꿈이었네요.”
그들은 그날 밤, 천천히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눴다.
늦은 밤, 가게 한쪽에서는 취업 준비생 강도윤이 홀로 앉아 있었다.
그는 오늘도 이력서를 펼쳐 들고,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때, 그의 맞은편 자리에 최소현이 앉았다.
그녀는 늘 그렇듯 커피를 시키며 조용히 말했다.
“오늘은 취업 준비가 잘 돼가요?”
도윤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요즘 제 길이 맞는 건지 고민돼요.”
그의 말에 최소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나도 그랬어요. 건축이 내 길이 맞는 건지, 정말 고민을 많이 했죠.”
도윤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럼 어떻게 확신을 가질 수 있었어요?”
최소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확신이란 건 없어요. 하지만, 내가 선택한 길을 계속 걸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길이 만들어지더라고요.”
그 말에 도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그는 그녀의 말을 가만히 곱씹으며, 노트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한 손님이 조용히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천천히 펜을 들어 글을 적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각자의 길을 찾아가고 있지만, 때때로 이렇게 같은 공간에서 머물러 간다.”
그는 조용히 펜을 내려놓고, 잔을 기울였다.
주인장은 바 뒤에서 조용히 노트를 덮으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오늘도 계동리는, 누군가에게 조용한 위로가 되는 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