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스쳐 가는 밤, 머무는 마음
늦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계동리의 창을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가게 안에서는 낮은 재즈 음악이 흐르고, 커피 향과 위스키 향이 은은하게 섞였다.
주인장은 바 뒤에서 조용히 잔을 닦으며 하나둘 들어오는 손님들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계동리는 다양한 이야기로 채워질 것이다.
문이 열리며, 두 남자가 들어왔다.
하나는 정년을 앞둔 가장 윤석진, 그리고 그의 아들 윤상우였다.
두 사람은 묘하게 어색한 분위기로 테이블에 앉았다.
주인장이 조용히 다가갔다.
“오늘은 어떤 걸로 드릴까요?”
윤석진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맥주 두 잔 주세요.”
잠시 후, 아들 상우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버지, 퇴직 후에는 뭐 하실 거예요?”
윤석진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천천히 말했다.
“글쎄, 아직 생각 중이다.”
아들은 망설이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 사실, 저는 아버지가 좀 쉬셨으면 좋겠어요.”
윤석진은 피식 웃으며 아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일만 하느라,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못 보냈지.”
그의 말에 상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장은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바라보며, 따뜻한 견과류 한 접시를 내밀었다.
작은 대화 속에서도, 부자는 서로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하고 있었다.
그때,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젊은 여성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녀는 가게를 둘러보더니,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그녀는 조용히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주인장은 가만히 다가가 물었다.
“오늘 처음 오셨죠?”
여성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근처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조용한 곳을 찾고 있었어요.”
그녀는 작가 지망생 강해진이었다.
“글을 쓰신다고요? 어떤 이야기인가요?”
주인장이 묻자, 해진은 망설이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사람들 이야기요. 일상 속에서 스쳐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 말에 주인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여기가 딱 맞겠네요.”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노트북을 조용히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날 밤, 그녀는 계동리에서 영감을 얻어 새로운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참 후, 문이 열리며 터키 아이스크림 가게를 운영하는 젊은 부부가 들어왔다.
그들은 밝은 얼굴로 들어와 주인장에게 말했다.
“사장님, 이번 연말에 작은 이벤트 하나 해보는 건 어떨까요?”
주인장은 흥미로운 듯 물었다.
“어떤 이벤트요?”
부인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계동리에 오는 사람들끼리, 올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공유하는 거예요.”
남편이 덧붙였다.
“우리가 작은 노트를 마련해서, 손님들이 올해 가장 소중했던 순간을 한 줄씩 적어보는 거죠.”
주인장은 그들의 아이디어를 가만히 곱씹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네요. 그렇게 하면, 이곳이 더 특별한 공간이 될 것 같아요.”
그날 밤, 계동리에는 새로운 노트 하나가 추가되었다.
“올해 가장 소중했던 순간”
그 안에는 손님들의 조용한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여갈 것이다.
늦은 밤, 바 한쪽에서는 김민석이 기타를 조용히 튕기고 있었다.
그때, 최소현이 들어왔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김민석은 그녀를 보고, 짧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도 오셨네요.”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이곳이 편해서요.”
그는 기타를 조용히 치면서 말했다.
“오늘은 어떤 노래를 들려드릴까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종이에 짧은 메모를 적어 그의 앞에 놓았다.
“겨울과 잘 어울리는 노래를 들려주세요.”
그는 메모를 보며 작게 웃었다.
그리고 기타를 치며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도
이 공간은 언제나 따뜻하길”
그녀는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그 노래를 들었다.
오늘 밤, 계동리는 유난히 더 따뜻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주인장은 조용히 ‘계동리 사람들’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오늘 밤, 새롭게 남겨진 글을 발견했다.
“오늘 나는, 아버지와 맥주를 마시며 진심을 나누었다.
오늘 나는, 처음으로 내 글을 썼다.
오늘 나는, 올해 가장 소중한 순간을 남겼다.”
그는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노트를 덮었다.
오늘도 계동리는, 누군가에게 조용한 위로가 되는 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