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잔잔한 밤, 그리고 저마다의 이야기
늦겨울 밤, 계동리의 창가에는 노란 불빛이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
가게 안에서는 여전히 따뜻한 커피 향과 위스키 향이 섞이며,
잔잔한 재즈 음악이 공간을 감싸고 있었다.
오늘도, 계동리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지고 있었다.
주인장은 조용히 바 뒤에서 잔을 닦으며, 하나둘 들어오는 손님들을 맞이했다.
문이 열리며 H건설사의 오경식, 최준혁, 최소진이 들어왔다.
그들은 피곤한 얼굴로 익숙한 자리에 앉으며 가방을 툭 내려놓았다.
“오늘은 맥주부터 주세요.”
최소진이 먼저 말했다.
주인장은 말없이 차가운 맥주잔을 건네주었다.
잔을 들기 전에, 경식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설계 변경, 또 들어왔어요.”
준혁이 고개를 젓더니 맥주를 한 모금에 들이켰다.
“클라이언트는 쉽게 말하죠.
‘이 부분 조금만 바꾸면 안 되나요?’
근데 그 ‘조금’이 한 달 치 일이라고요.”
소진도 피곤한 얼굴로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야근. 매일 야근.”
그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주인장이 가만히 물었다.
“그래도, 버틸 이유는 있잖아요?”
경식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월급이죠. 월급만큼 확실한 동기가 또 있나요?”
그러면서도,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함 속 작은 성취감이 스며있었다.
그날 밤, 그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피로를 조금씩 덜어냈다.
늦은 밤,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한국예술종합대학교 건축학과에 재학 중인 이서현이었다.
그녀는 늘 밤늦게 이곳을 찾았고, 손에 늘 두꺼운 스케치북이 들려 있었다.
“오늘도 야작 했어요?”
주인장이 커피를 내려주며 물었다.
서현은 피곤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근데 요즘 고민이 많아요.”
그녀는 스케치북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건축이 나한테 맞는 길일까, 가끔은 모르겠어요.”
주인장은 커피잔을 그녀 앞에 조용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모든 길이 그렇죠. 걸어보지 않으면 모르잖아요.”
서현은 조용히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주인장의 말을 곱씹었다.
그녀는 스케치북 한 장을 찢어, 빠르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그림을 주인장 앞에 조용히 밀어놓았다.
그림 속에는, 계동리의 따뜻한 불빛이 담긴 장면이 있었다.
“이 공간이 좋아서요. 언젠가는 이런 공간을 직접 설계하고 싶어요.”
그녀의 말에, 주인장은 잔을 닦으며 조용히 웃었다.
“그럼, 계속 걸어가야겠네요.”
그때, 문이 열리며 최소현이 들어왔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잠시 후, 김민석이 기타를 들고 들어왔다.
그는 바 한쪽에 앉아 기타를 조용히 튕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도 노래 부탁할까요?”
최소현이 먼저 물었다.
김민석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요즘 저한테 자주 요청하시네요.”
“좋은 노래는 여러 번 들어도 좋잖아요.”
그는 기타를 조용히 치기 시작했다.
“지나간 계절 속에서도
우린 같은 공간에 머물렀네”
최소현은 조용히 노래를 들으며 커피잔을 감쌌다.
그들의 대화는 많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공간에는 따뜻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날 밤, 한 손님이 바 한쪽에 비치된 ‘계동리 사람들’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조용히 한 줄을 남겼다.
“오늘 나는, 내가 걸어온 길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길은, 걸어가는 동안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잔을 기울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주인장은 노트를 덮으며, 바깥 창문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계동리 안은 여전히 따뜻했다.
오늘도, 누군가는 이곳에서 머물고,
또 누군가는 자신만의 길을 찾아 떠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