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머물렀던 자리, 남겨진 이야기
늦겨울 밤, 계동리는 언제나처럼 따뜻한 불빛을 내뿜고 있었다.
밖에서는 바람이 세차게 불었지만, 가게 안은 여전히 온기가 가득했다.
잔잔한 음악과 커피 향, 위스키 향이 섞여 조용한 밤을 더욱 부드럽게 만들고 있었다.
오늘도, 계동리는 저마다의 이야기로 채워질 것이다.
주인장은 조용히 바 뒤에서 잔을 닦으며, 하나둘 들어오는 손님들을 맞이했다.
문이 열리며 정년을 앞둔 가장 윤석진이 들어왔다.
그는 자연스럽게 창가 자리에 앉아 맥주를 주문했다.
주인장은 익숙한 듯 맥주잔을 건네며 물었다.
“오늘은 혼자 오셨네요.”
윤석진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아들이랑 같이 올까 했는데,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는 조용히 맥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요즘 이상하게 시간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주인장은 잔을 닦으며 조용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오랫동안 일만 하다 보니, 이제는 시간이 너무 많을 것 같아서요.
그게 좋을 줄만 알았는데, 막상 다가오니 조금은 낯설기도 하고요.”
그의 말에 주인장은 조용히 말했다.
“이곳에 오시는 분들은 다들 비슷한 고민을 하시는 것 같아요.”
윤석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직은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아요.”
그는 맥주를 마시며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멀리 가로등 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늦은 밤,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이서현이었다.
그녀는 늘 밤늦게 이곳을 찾았고, 손에는 두꺼운 스케치북이 들려 있었다.
“오늘은 어떤 고민인가요?”
주인장이 커피를 내려주며 물었다.
서현은 스케치북을 펼치며 말했다.
“건축 설계 공모전에 나가볼까 해요.”
주인장은 흥미로운 듯 물었다.
“공모전이요?”
그녀는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 사실 자신은 없는데, 한 번쯤은 도전해 보고 싶어서요.”
주인장은 조용히 커피를 그녀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런 도전이 결국,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는 거겠죠.”
서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덜 두려워지네요.”
그녀는 스케치북을 펼쳐 빠르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그림을 주인장 앞에 조용히 밀어놓았다.
그림 속에는, 계동리의 풍경이 담겨 있었다.
“이곳이 저한테는, 좋은 영감이 돼요.”
주인장은 가만히 미소 지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이희재 PD가 들어왔다.
그는 피곤한 얼굴로 자리에 앉더니, 소주를 주문했다.
주인장이 말없이 소주 한 병과 잔을 건네며 물었다.
“오늘은 어떤 고민이세요?”
희재는 한숨을 쉬며 소주를 한 잔 들이켰다.
“요즘 다큐멘터리를 기획 중인데요.”
그는 조용히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문득, 이곳을 배경으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인장은 흥미로운 듯 물었다.
“계동리를요?”
희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기 오는 손님들,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잖아요.
가게 안에서 오가는 대화들, 누군가가 남기고 간 흔적들…
그걸 영상으로 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주인장은 조용히 잔을 닦으며 말했다.
“좋은 이야기들이 많이 쌓였죠.”
희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문제는… 이 이야기가 과연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을까, 하는 거예요.”
주인장은 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했다.
“이 공간에서 나눈 이야기들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듯이…
그 다큐멘터리도 누군가에게는 분명 의미가 있을 거예요.”
희재는 그 말을 조용히 곱씹으며, 다시 잔을 기울였다.
그날 밤, 그는 노트에 무언가를 조용히 적기 시작했다.
가게 한쪽에 비치된 ‘계동리 사람들’ 노트.
그날 밤, 누군가가 조용히 한 줄을 남겼다.
“오늘 나는, 새로운 도전을 다짐했다.
오늘 나는, 오래된 익숙함과 새로운 낯섦 사이에 서 있다.
오늘 나는, 이곳에서 위로받았다.”
주인장은 조용히 노트를 덮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 누군가는 지나가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그 불빛 아래에서 잠시 머무르고 있었다.
오늘도 계동리는, 누군가에게는 잠시 머무는 곳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다시 시작하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