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종로구 계동길

21화. 가끔은, 말없이 머무는 것만으로도

by 나바드

늦겨울의 바람이 창문을 스치고 지나갔다.
계동리는 여전히 따뜻한 불빛을 품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밖을 감싸고 있었지만, 가게 안은 언제나처럼 온기로 가득했다.

커피 향, 와인 향, 그리고 낮게 깔린 재즈 음악.
오늘도 이곳에서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주인장은 바 뒤에서 조용히 잔을 닦으며, 하나둘 들어오는 손님들을 맞이했다.


1. 서울대병원의 의사들, 그리고 지친 하루

문이 열리며 김봉준, 임수정, 유진수가 들어왔다.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의사들과 간호사들에게 오늘도 긴 하루였다.

그들은 늘 익숙한 자리에 앉아 조용히 주문을 했다.


“오늘은 그냥 맥주 주세요.”


봉준이 말하자, 주인장은 차가운 맥주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진수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정말 정신없었어요. 계속 긴급 수술이 이어졌어요.”


수정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를 살리는 건 의사의 역할이지만…

정말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봉준이 잔을 기울이며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최선을 다했잖아요.”


주인장은 말없이 작은 접시에 견과류를 담아 그들 앞에 놓았다.


“가끔은, 말없이 머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때가 있죠.”


그들은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며 잔을 부딪쳤다.

이곳에서는,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2. 터키 아이스크림 가게를 운영하는 부부, 그리고 작은 기념일

그때, 문이 열리며 터키 아이스크림 가게를 운영하는 부부가 들어왔다.

늘 그렇듯 다정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설레는 듯한 표정이었다.

주인장이 웃으며 물었다.


“오늘은 무슨 날인가요?”


부인이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가게를 연 지 3주년 되는 날이에요.”


남편이 그녀를 바라보며 잔을 기울였다.


“우리가 이렇게 오래 버틸 줄 몰랐죠.”


주인장은 와인 한 병을 내며 말했다.


“그럼, 축하를 해야겠네요.”


그들은 와인잔을 부딪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무모한 도전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렇게 버티고 나니… 그때의 선택이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요.”


주인장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좋은 일은, 이렇게 천천히 쌓여가는 법이죠.”


그날 밤, 그들은 작은 기념일을 축하하며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3. 김민석과 최소현, 그리고 변해가는 거리감

그때, 문이 다시 열리며 최소현이 들어왔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잠시 후, 김민석이 기타를 들고 들어왔다.

그는 그녀를 발견하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오늘도 오셨네요.”


그녀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곳이 편해서요.”


김민석은 기타를 조용히 튕기며 말했다.


“그럼, 오늘은 어떤 노래를 듣고 싶나요?”


최소현은 잠시 고민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이곳에 어울리는 노래요.”


김민석은 피식 웃으며, 천천히 연주를 시작했다.


“이 밤에 머무는 사람들

이 공간에서 흘러가는 이야기들
우리는 어쩌면, 같은 시간을 지나가고 있나 봐”


그녀는 커피를 마시며 노래를 들었다.

그들은 점점 더, 자연스럽게 서로의 공간에 머물고 있었다.


4. ‘계동리 사람들’ 노트에 남겨진 흔적

그날 밤, 한 손님이 바 한쪽에 비치된 ‘계동리 사람들’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조용히 한 줄을 남겼다.


“가끔은, 아무 말 없이 머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주인장은 조용히 노트를 덮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계동리 안은 여전히 따뜻했다.

오늘도 계동리는, 누군가에게는 잠시 머무는 곳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다시 시작하는 곳이었다.

keyword
이전 20화종로구 계동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