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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mel Dec 03. 2021

비를 부르는 여자

-단편소설 써보기-

<비를 부르는 여자>     

 


 비가 내리는 밤은 사람들에게 저마다 다른 시간을 가져다주곤 한다.     

 그날 밤 남자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들은 너무나 평범하고 익숙했다. 도시의 막걸리 가게는 모처럼 손님들로 가득 차있었다. 퇴근 시간이 되자 사람들은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하나 둘 짝을 지어 몰려와 막걸리잔과 전이 담긴 접시를 비워냈다. 실로 오랜만에 오는 비는 머리가 헤실헤실해지기 시작한 가게 사장님의 입가에 미소를 선물하고 있었다. 그 가게 앞을 지나는 한 쌍의 연인은 좁은 우산 속에서 꼭 붙은 채 그들만의 몸짓과 이야기들로 그 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다 둘은 잠시 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이야기를 나누었고 곧이어 여자가 먼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우산을 접고서 젖은 한쪽 어깨를 툭툭 털고 따라 들어갔다. 그 옆으로 미처 우산을 챙겨 오지 못했는지 검은 양복 재킷을 뒤집어쓰고 달려가는 남자도 있었다. 그는 무슨 중요한 약속에 늦었는지 뭐라 잘 알아듣기 힘든 말 들을 중얼거리며 곧장 택시에 올라탔다. 떠나는 택시 옆으로 우산을 들기보다는 매달려 간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한 꼬마 아이와 전화를 힘들게 이어가면서 아이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아이의 엄마가 있었다. 아이는 엄마의 마음을 모르는지 그저 천진난만하게 보도블록에 새겨진 물웅덩이만을 골라서 밟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거리에서 혼자만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비만 오면 그는 모든 것을 멈춘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돼버렸다. 그는 빗속에서 혼자였다. 비가 내리는 도시의 밤. 그 속에서 혼자 남겨지는 사람들이 세준 자신뿐만이 아님을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과는 조금 더 특별하다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 그는 비만 오면 너무나도 철저하게 혼자가 되었고, 스스로 텅 빈 혼자만의 공간을 만들어 들어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지금도 멍하니 서있다. 왜 비가 내리면 누군가는 그 자리에 멈추어 버리는 걸까.     


 비를 부르는 여자. 그녀는 그에게 특별한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다. 5년 전 그녀를 처음 만나던 날은 여전히 생생하다. 소나기가 내리던 저녁, 처음 만난 두 남녀는 하나의 우산 속에서 서로의 마음이 같다는 것을 확인했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그날 그는 이해할 수 있었다. 운명적인 끌림처럼 둘은 가까워졌다. 비 오는 날의 흔한 친절이 연애의 시작이었다. 그가 용기를 내 신청한 다음 만남에도 우연히 비가 내렸다. 세 번째 만남에는 날이 좋았다. 따뜻한 햇살 아래서 처음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날 밤 그녀를 바래다주던 골목길에 들어서자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그는 허둥지둥 재킷을 벗어 그녀를 감싸주었다. 곧바로 그녀가 웃으며 가방에서 우산을 꺼냈다. 


“혹시 몰라 들고 왔어. 있잖아, 나는 비가 오는 날이면 특별한 일이 생길 것 같더라.” 


 특별한 날. 그녀를 처음 만나던 날도 비가 내렸다. 그다음 만남도, 그리고 오늘 이 순간도 어김없이 비가 내린다. 다시 그날로. 세준은 본인이 그녀에게 특별하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멍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 천진난만한 미소가 너무 아름다웠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그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따뜻했다. 이윽고 그녀도 그를 안았다. 연신 떨어지는 차가운 빗방울들이 무색하게 그들은 뜨겁게 입을 맞추고 또 맞추었다.     

 

 그렇게 1년을 만났다. 그동안 믿기 힘든 날들이 많았다. 그녀의 생일에 비가 내렸다. 첫 여행에도 비가 내렸다. 처음 서로를 안던 밤에도 비가 왔다. 겨울에는 비대신 눈이 내렸다. 그녀와 함께하는 특별한 날에는 꼭 비가 내리는 것이었다. 그는 날이 좋은 날에 돌아다닌 기억이 없어 내심 속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가 내리면 내릴수록 그녀와의 사랑은 깊어지는 듯했다. 운명적인 만남이야.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들의 시간은 쉬지 않고 참 빠르게 흘러갔다. 그 해 가을이 되었고, 그는 어느 소년들과 다름없이 군대로 떠나야만 했다. 가고 싶지 않아도 가야만 하는 남자들의 숙제. 울상이 된 그녀를 뒤로 하고 그는 떠나야만 했다. 잠시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하면서. 무엇보다 둘 사이의 운명적인 애정을 믿었기에 그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 마음을 읽은 듯 그녀 또한 마지막 날만큼은 웃으며 그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 메말라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휴가를 나와 그녀를 만나는 날이면 꼭 우산을 챙겨가던 그였지만, 비가 내리지 않는 날들이 많아졌다. 맑으면 맑을수록 표정에 먹구름이 드리워지는 연인들이었다. 그는 점점 불안해져 갔다. 그냥 우연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그녀와의 다툼은 잦아지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남자의 전역이 가까워진 어느 봄날. 꽤 길었던 휴가가 끝나던 그날에, 그녀는 그에게 이별을 말했다.      


“이제 널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지치고 힘들어. 미안해. 우리 헤어지자. 그래도 너,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


 그녀와 마주한 카페 테이블의 창문 너머로는 비가 한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마음이 정말 아팠다. 쓰리다 못해 찢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왜 인지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입 안에 맴돌던 말들을 곱씹은 채로 그녀의 말을 묵묵히 받아들였다.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선 그녀를 잡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비가 내린다는 것은 그녀에게 특별한 날이니까. 누가 들으면 비웃음칠 믿음이자 이유였지만, 그 사실 하나로 그는 그녀를 잡지 않기로 했다. 그는 지난날 들을 곱씹으며 남은 커피를 입에 털어 넣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비가 내리는 날이면 그는 그녀를 여전히 털어내지 못하고 있다.             

 

다시 도시의 길거리. 그는 삼십 분 가까이 한 자리에 서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채 발걸음을 집으로 내디뎠다. 집에 도착한 후 젖은 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면서도, 그의 고양이를 잠깐 안아줄 때도, 다 해진 칫솔로 이를 닦을 때에도 그의 머릿속은 한 사람으로 가득했다. 12시가 넘어가자 이대로 잠을 못 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창문을 다 닫고 블라인드를 끝까지 내렸다. 곧바로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냈다. 고민할 필요 없이 시원한 한 모금을 들이키며 스피커에 그의 휴대폰을 연결했다. 기타 소리가 듣고 싶어서 고르고 고른 것이 결국 또 김광석의 <그날들>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기타 소리와 그 떨리는 목소리가 좋았다. 빗소리를 지운 조용한 울림의 소리만 방 안에 남고 나서야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맥주가 전해주는 나른한 취기도 마침 몸에 퍼지고 있었다. 이내 졸음이 몰려왔고 옆에서 고양이가 몇 번 울어대다가 세준의 어깨 옆에 나란히 누웠다. 그제야 비가 오는 날은 그를 놓아주었다. 여느 때처럼.


 다음 날 아침,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탁상 위에 놓인 아이폰을 더듬거려 겨우 알람을 껐다. 이렇게 세준의 하루는 시작된다. 말이 하루의 시작이지 그는 그 후로 한 시간을 더 이불속에서 보낸다. 9시가 되어서야 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여전히 나오고 있는 김광석의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그는 폰을 던져버리고 말았다. 곧바로 냉장고로 달려가 차가운 물을 연달아 마셨다. 그는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다시 눈을 비비고 숨을 고른 채 아이폰을 다시 들어 올려 화면을 바라보았다. 꺼져버린 노래가 가져온 공허한 침묵의 틈 속에서 다시 확인한 화면 속. 새 메시지 알림 창이 있었다. 

그녀였다.



읽는 분들이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단편소설을 이어가 보려 합니다.

많은 이들이 겪는, 겪었던, 겪고 있는 서툰 사랑과 연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특별하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특별하다는 것은 변함없이 이어지는 것일까요. 특별할 것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특별함. 재밌게 지켜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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