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깨도 깨도 다시 나타난다

인생 게임에서 왕을 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by 설작가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를 좋은 병원에 모셨고

모든 것이 잘 됐다 싶었건만...

며칠 가지 않아 또 문제가 생겼다.


크고 작은 문제는 지금까지도 생기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생길 것이다.

모두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을 했던 것이었지만

제발 나의 우려에서 그치기를,

현실에선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가장 큰 문제는 간병인이었다.


코로나로 보호자 접견이 금지되었기에

우리가 믿을 사람이라곤 간병인뿐이었다.


아버지를 입원시켜드리던 날,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간병인께

여러 번 고개를 숙이는 것뿐이었다.


내가 본 간병인은 씩씩하고 밝았고

베테랑 같았다.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난 사람을 좋게 보는 경향이 있다.

간병인이 내가 본 그대로의 사람이기를...


며칠 뒤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간병인의 태도가 돌변했단다.

아무래도 간병인을 잘못 만난 것 같단다.


엄마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빵과 잼,

흑초, 얼음을 챙겨 병원을 찾으셨는데

간병인은 이런 걸 가져오면 어떡하냐고,

냉장고를 개인 물품으로 채울 수 없다며

다시 가져가라고 했단다.

아주 싸늘한 태도로...


전에 간병인이 먼저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면 가져오라고,

챙겨드리겠다고 했었고

엄마는 그 말을 듣고 챙겨간 것뿐인데

돌변한 간병인의 태도에 크게 당황하셨다.


또 간병인은 엄마에게

"죽겄네, 죽겄어~ 힘들어서 못 살겄네!" 라며

아버지 때문에 힘들다는 티를 팍팍 내셨단다.


간밤에 아버지가 기저귀를 풀고 소변을 보셔서

뒤처리에 고생을 하신 것 같았다.

(그것도 그 간병인은 쉬는 날이라

다른 간병인이 겪은 일이었는데도...)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제가 잘못 알아들었나 보다며 고개 숙이고

잘 부탁드린다며 고개 숙이는 일뿐이었다.

엄마는 졸지에 죄인이 되어 있었다.


엄마는 속상한 마음에 발만 동동 구르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간병인은 옆 병실

간병인에게도 아버지 험담을 한 모양이었다.


보호자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는 간병인이

아버지에게 잘할 리 없다는 생각에

엄마의 걱정은 커져만 갔다.



엄마는 외가 식구들과 간병인에 대한

고민을 나누며 되려 걱정과 화를 키우셨고

내가 느끼기에 간병인은 실제보다

더 나쁜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간병인의 자질이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간병인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간병인을 탓하고 욕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난 엄마에게 최대한 객관적으로 말씀드렸다.

사실 간병인의 입장에 서서 말씀을 드렸다.


간병인은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가족들이

유난스럽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계속 사식을 가져오면 문제가 될 수 있으니

단호하게 말을 한 것일 수 있다,


간병인은 잠이 제일 중요한데

밤까지 아버지 소변을 따로 챙기긴 힘들 것이다,


간병인의 입장에선 손이 많이 가는 아버지가,

통제에 잘 따르지 않는 아버지가

곱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간병인에게 가족처럼 대해주길 바라는 건

무리이고 간병인도 사람인지라

힘든 걸 동료에게 얘기할 수도 있지 않겠냐,


저도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간병인을 욕하고

걱정만 키우는 것이 아니라

병실을 옮기거나 간병인을 꾸는 거라고,

에너지를 거기에 집중하자고 말씀드렸다.


내가 엄마에게 한참을 얘기하는 동안

엄마는 기죽은 목소리로 대답하셨다.


"응... 그래... 알았어..."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니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로가 필요한 엄마에게...

내가 한번 더 죄인을 만들어버린 건 아닐까?



엄마와 전화를 끊고 내가 잘한 건지 돌아봤다.

입장 바꿔서 내 아내, 내 자식이 간병인에게

미움을 받고 자존감 떨어지는 일들을 당해도

난 내가 말했던 것처럼 냉정할 수 있을까?


나 역시 감정적인 대응이 앞설 것도 같다.

그럴 때 누군가 옆에서 나처럼 조언한다면?

내 맘은 알고 말하는 건지 야속할 것도 같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 한다.

엄마 곁에서 같이 화내고 욕해줄 사람은 있지만

나까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맞장구 쳐주면 되지만

언제나 그게 좋은 결과를 담보하진 않는다.


결정적 한방이 있을 때까지 증거를 모으고,

그때까진 간병인에게 굽신거리고 사정해야 한다.

더럽고 아니꼽더라도

단 1이라도 득이 되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때 난 그게 최선인 줄 알았다.



간병인의 못마땅한 태도는 며칠 더 지속됐고

엄마는 맘 졸이는 날을 며칠 더 보내다가

결국 병원에 클레임을 제기했다.


병원에서는 금방 조치를 취해줄 것 같았지만

쉽게 바뀌는 것은 없었고 우린 결정해야 했다.

다른 대안을 찾아야 했다.


이 판 왕을 깨면 다음 판 더 센 왕이 나타나는

인생 게임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게임은 질 수도, 포기할 수도 없고

언제 끝이 날지 알 수 없는 게임이라는 게 함정.


세상에 쉬운 일은 없고

뜻대로 다 되지도 않는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이건 게임이다.

이 판에 나타난 왕만 생각하자.



하지만 왕은 아무리 깨고 부셔도

다른 놈이 다시 나타날 것이다.

내가 죽을 때까지 계속...


어쩌면 왕을 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다른 데 있는 것 같았다.


엄마를 위로해드리고 공감해드리는 것.

옳고 그름을 따지기 보다는

일단 엄마 편에 서는 것.



남은 것이라고는 오로지 인간이 지닌

자유 중에서 가장 마지막 자유인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 뿐이다.

- 빅터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


닥치는 상황을 어찌할 순 없어도,

내가 도저히 깰 수 없을 것 같은

왕이 나타나더라도,

그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는

오롯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언제나 엄마의 편이 되자.

최대한 친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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