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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를 만나다

나의 인연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by 글꽃향기


2025년 2월 말, 8년 동안 함께하던 데스크톱 컴퓨터와 이별을 했습니다. 평소에 주로 쓰는 용도-검색, 글쓰기, 유튜브 음악 재생-로는 문제가 없었지만 정작 중요한 작업을 할 때에는 파업을 선언하던 아이였습니다. 80% 이상 작업을 끝내고 한숨을 돌릴 때 즈음이면 갑자기 먹통이 되기 일쑤였지요. 사실 2년 전부터 '바꿔 볼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는 했었습니다. 조금만 더 버텨보자 심정으로 주머니를 여미곤 했었지요. 그러나 최근 6개월 동안은 상태가 더욱 심각해졌고, 나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데스크톱이 파업을 시작할 무렵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2년 전, 이사를 하며 저렴한 노트북을 구입했습니다. 노트북은 취미 생활용으로는 손색이 없었지만 밥벌이와 관련된 작업을 하기엔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습니다. 중요한 작업을 할 때에는 데스크톱을 주로 사용하고 있었지요. 데스크톱에 연결된 두 개의 모니터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매력 중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나와 인연이 된 아이는 모니터-본체 일체형 컴퓨터였습니다. 덕분에 책상에는 여유 공간이 생겼고, 분위기 역시 화사해졌지요. 밥벌이와 관련해 꼭 필요한 한글 프로그램도 최신형으로 설치해 주었습니다. 비록 주머니는 가벼워졌지만 마음만큼은 든든해졌습니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완벽했습니다. 새 학년 준비의 속도는 빨라질 거라 확신했지요. 블로그와 브런치 스토리 글 발행 역시 활발해질 거란 기대감에 마음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어라? 그런데 복병은 따로 있었습니다. 새로 인연을 맺은 아이와 함께 온 키보드가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나의 타이핑 입력 속도와 화면에 나타나는 글자의 출력 속도에 시간 차가 꽤 있었습니다. 글자가 연달아 반복되며 화면에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분명히 '복병은 따로 있었다.' 여덟 글자를 키보드에 두드렸는데, '복병은 은따로 로있었다.' 열 글자가 화면에 보이곤 했지요.





'아니, 너네 같이 온 아이들 아니었니?'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back '키와 친해져야만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컴퓨터 단자의 위치를 바꿔 가며 블루투스 USB를 꽂았다 빼길 반복하였습니다. 타이핑 습관에 문제가 있나 싶어 손가락을 좀 더 위로 튕겨도 보았습니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니, 이 사람들, 물건 똑바로 안 만들어?"



화살의 불똥이 멀리까지 튀어 갔습니다. 고객 센터에 전화를 해서 전면 교체를 요구할까 생각도 해 보았지요. 하지만 평일에 여유가 없었던 시기라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전에 쓰던 데스크톱 컴퓨터의 짝꿍을 꺼내 보았습니다. 당근 나눔 대기를 위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아이였습니다. 그동안 사용하면서 별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으니 이번에도 활약을 해주지 않을까 기대를 하며 배터리 공간을 다시 채워 주었습니다. 블루투스 연결까지 마쳤습니다.






한동안 함께했었기 때문일까요? 자판을 두드리는 나의 손길과 화면에 나타나는 글자가 찰떡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나의 노력에 만족스러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새로운 아이가 아직 손에 익지 않아서 그랬나 보다!'

고객 센터에 전화하는 것을 망설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잔인한 3월까지는, 휴식을 멈추고 나와준 아이에게 좀 더 부탁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일이 몰려 있는 시기를 잘 넘겨보고 새로운 아이와 친해져 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만족스러움은 아주 잠시 동안 이어질 뿐이었습니다. 문제는 반복됐습니다. 같은 글자가 연달아 화면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뭐가 문제일까?'




오기가 생겼습니다. 이번에는 노트북과 연결되어 있는 키보드에게 SOS 구조 요청을 보냈습니다. 자리를 잘 잡고 있는 아이에겐 미안했지만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니 짝꿍 고향 출신 아이랑 친구 좀 해 줄래?'

부탁에 부탁을 얹어 마음을 건넸습니다. 제발 이번만큼은 문제가 해결되길 바랐습니다.







이 아이는 다행히 마음이 넓었습니다. 통보도 없이 짝꿍이 바뀌었다고 성내지 않았습니다. 새 친구와도 합을 잘 맞추어 나갔습니다. 컴퓨터와는 거리가 제법 있는 곳을 고향으로 둔 아이인데 짝꿍을 잘 맞이해 주었습니다. '인연은 따로 있는 것일까?'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께 온 짝꿍을 거부했던 아이는 어디로 보내야 할까요? 아뿔싸, 하루아침에 친구를 빼앗긴 노트북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같은 고향 출신인데, 너네 한 번 사귀어 볼래?'







양쪽의 입장을 확인하지 않은 채 제 맘대로 짝을 지어 주었습니다.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발 너희들은 한 번에 친해지렴!'

알 수 없는 미안함에 괜히 주변 정리를 해 봅니다. 서로에게 불만 없길 바라며 괜히 보이지도 않는 먼지를 닦아 봅니다. 저의 바람을 들었던 걸까요? 다행히 문제없이 인연을 맺어 주었습니다.




편안히 쉬고 있다가 난리 블루스에 합류했던 -8년 지기 본체와 짝꿍이었던- 검은색 친구는 다시 당근 나눔 대기조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새로운 주인을 만날지, 아니면 비상시에 다시 활약해 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적어도 한동안은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원래의 자리에 편안한 모셔 두었습니다.




짝꿍 바꾸기가 마무리된 지 2개월째 접어듭니다. 돌아보니 한자리에서 맡은 일을 해내는 이 아이들에게도 인연이란 게 따로 있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이미 운명처럼 짝을 맺었지만 처음부터 삐거덕대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었지만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하루아침에 짝꿍이 바뀌어 버린 아이들도 있었지요.



문득 나의 인연들이 떠오릅니다.



일 년의 인연으로 맺어지는 꼬마 친구들이 있습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합이 맞지 않아 힘들어도 일 년을 함께 해야 합니다. 더 함께하고 싶어도, 간절히 원해도 일 년 후엔 그 인연은 끝이 납니다. 함께하는 동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향이 맞지 않아 갈등이 잦아도 일 년 동안 함께해야 합니다. 계속 함께하고 싶어 몸부림쳐도 쉽지는 않습니다. 간혹 운이 좋아 그 인연이 이어지기도 하지만 환경과 구성원이 달라진 조건에서 관계가 한결같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가족의 인연을 생각해 봅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질긴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인연이지요. 상처 주기를 밥 먹듯이 해도, 찢어지게 가난한 환경이어도 그래서 벗어나고 싶어도 그 질기디 질긴 끈을 끊어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설령 벗어난다 하더라도 마음에 연결된 끈만큼은 놓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멀어지는 인연들을 끄적여 봅니다. 마음을 다 내어 주었는데, 둘도 없는 사이였는데, 한순간에 멀어져 갑니다. 때로는 그 영문조차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 갖은 노력을 해도 점점 멀어져 갑니다. 다정한 말을 건네려 해도 누가 훼방을 놓는지 마음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결국엔 끝이 나서 마음이 찢어지게 아파도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다가오는 인연들도 있습니다.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맺어지는 인연입니다. 나와는 그 어떤 연결고리도 없기를 바라고 바라지만 어느샌가 내 삶 깊숙이 자리 잡기도 합니다.




행복해지든 불행해지든 어찌할 도리 없이 묵묵히 받아들여야만 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도 키보드를 이리저리 바꾸어 보고 맞추어 보았던 나와 같은 존재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짝꿍이 바뀐 아이들처럼, 고된 일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다가 갑자기 깨어나 새 친구를 만났던 아이처럼, 나 역시 세상에선 키보드와 비슷한 처지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인연들이 바뀌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이유를 깨닫기도 합니다. 사람과의 인연도 내 앞에 펼쳐지는 모든 존재와의 인연도 말입니다.




이제는 조금 덤덤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멀어지고 다가오는 모든 인연에 대해, 생각지도 못했던 어려움에 대해, 다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며 아주 조금이라도 너그러워졌으면 합니다. 새로운 인연과 짝을 이룬, 갑작스런 변화에도 말없이 따라준 키보드를 보며 생각에 잠겨 봅니다.




키보드를 만나서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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