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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탭을 만나다

지금 그대로도 의미가 있다

by 글꽃향기


"이제 데스크톱 좀 바꾸자!"

"문제 있어?"

"엄청 버벅대는 거 알잖아."

"나는 노래나 재생할 뿐이라서..."

"뭐 좀 하려고 하면 너무 힘들어."

"얼마나 됐지?"

"2017년 2월에 바꿨더라."




꽤 오래전부터 비슷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모르긴 몰라도 최소 2년은 되었으리라. 미뤄 왔던 일이었지만 이번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는 그 오래된 바람을 이루고 싶었다. 우리집 컴퓨터의 임무는 블로그나 브런치 스토리 포스팅, 유튜브 음악 재생, 검색, 한글 문서, PPT 작업이 대부분이긴 하다. 하지만 종종 일터의 문서를 열어보려 시스템에 접속할 때면 한참을 버벅대거나 오류가 난다. 인내심을 갖고 겨우겨우 열어놓은 창이 모두 닫히기 일쑤였다.





평일 저녁, 남편과 함께 가전제품 매장에 가서 제품을 둘러보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을 맞추기가 참 힘들었다. 2년 전부터 '이번에 바꿔 보자!' 마음먹을 즈음, 항상 그렇게 시간이 맞지 않았다. 물론 인터넷으로 물건을 살펴봐도 충분하지만, 나는 옛날 사람인가 보다. 가전만큼은 꼭 직접 눈으로 확인 후 구입하고 싶었다.






"어휴, 안 되겠다. 그냥 나 혼자 가서 볼게. 여섯 시 반쯤 매장에 도착할 거야. 전화하면 꼭 받도록!"

나 혼자 가도 됐는데 왜 시간을 질질 끌었을까?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아마 다음 기회는 여름 즈음에나 올 것이 분명했다. 시스템에 접속하면서 자료를 준비하면서 또 후회하겠지.

'바꿀 걸!'




그렇게 들렀던 매장, 세상에 데스크톱 진열 상품이 딱 하나뿐이었다. 가장 최신 사양에 가장 비싼 제품이었다. 물론 나는 그런 고급 사양이 필요하지 않았다. 진열 제품을 보고 물건을 고르고 싶었지만 결국엔 브로슈어를 보고 데스크톱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매장 직원은 주된 용도를 물어보며 적당한 제품을 추천해 주었다. 요즘 나오는 데스크톱 제품의 대부분이 모니터, 본체 일체형이었다. 새로운 제품은 근거 없이 신뢰하지 않는 편이라 기존대로 모니터, 본체 따로 형을 구입하고 싶었다. 그런데 가격 차이가 어마무시했다. 간소화된 제품을 원하는 요즘 유행에 따라 생산 라인을 돌리나 보다. 따로 형 데스크톱은 고급형 사양으로 내 지갑에선 좀처럼 꺼내기 힘든 비용을 감수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본체, 모니터 일체형을 선택했다. 매장 방문일은 2월 21일(금)이었는데 배송 날짜는 2월 26일(수), 오후 3시로 잡게 되었다. 하루라도 빨리 새 컴퓨터로 책상 위를 화사하게 꾸미고 싶었으나 월요일, 화요일은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수요일에 일찌감치 출근해서 오전 중에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2시쯤 조퇴하면 될 것 같았다.





주말부터 나의 공부방은 분주해졌다. 목적이 분명한 방문도 워낙에 불편해 하는 편이라 기사님이 오셨을 때 빠르게 임무를 수행하고 퇴근(?) 하실 수 있도록 준비를 완벽히 해 놓고 싶었다. 만 8년이 넘은 나의 데스크톱을 정리할 시간이 되었다. 사실 이도 2년 전에 구입한 저렴이 노트북에 밀려 오랫동안 전원을 켜지 못한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래도 한때는 너의 전성기가 있었는데! 막상 이 아이를 정리하려 하니 옛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아이는 모니터 따로, 본체 따로의 커플이었다. 당시 구입했던 건 본체뿐이었다. 모니터는 기존에 사용하던 중소기업 제품이었고, 꽤 괜찮은 아이여서 새로 구입하진 않았었다. 2017년에서 2019년까지 그럭저럭 본체 한 대와 모니터 한 대가 사이좋게 나란히 놓여 있었다.




2020년 코로나 온라인 수업 자료를 만들던 시절, 모니터 한 대로는 참으로 버거웠다. 교실에서 모니터 두 개로 작업할 때 느낄 수 없었던 불편함을 오롯이 느껴야 했다. 학교에서 자료를 다 만들고 퇴근하면 좋았겠지만, 그 바닥이 근무 시간에 수업 준비만 할 수 있게 내버려 두질 않는다. 제출된 온라인 수업 과제를 일일이 확인하고 퇴근하기에도 벅찼었다. 그 시기, 처음에 -맨땅에 헤딩할 때-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적도 꽤 많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아, 맞다. 언니네 집 컴퓨터 처분한댔어. 그때 현관 앞에 모니터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는데!'

언니에게 SOS를 쳤다. 하지만 모니터만 밖에 내놓지 않았을 뿐, 케이블은 이미 처리한 지 오래전이라는 슬픈 이야기가 들려왔다. 밑져야 본전이니 일단 모니터를 들고 집으로 왔다. 여기저기 검색해서 필요한 케이블을 구입했다. '듀얼 모니터 연결하기 '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면서 땀을 삐질삐질 흘렸던 기억이 난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두 모니터에서 바탕 화면을 나란히 볼 수 있었다. 이제 맘 편히, 속도가 제법 붙어서 자료를 만들 수 있겠구나 싶어 '만세'를 부르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애를 써 준 아이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속도는 느려졌고, 프로그램은 자꾸 에러가 났다. 아마 한 번쯤 손을 본다면 몇 년은 더 버틸 수 있겠지만 나도 남편도 컴퓨터에는 문외한이다. 그리고 8년이면 이제 바꿔줘도 되겠다 싶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각종 케이블을 제거해서 잘 묶어 두었다. 혹시나 다른 곳에 쓸 만한 케이블은 따로 빼 두었다. 특히나 HDMI 케이블은 종종 쓸모가 있을 거란 생각에 잘 모셔 두었다.






세상에 주인공들을 모두 걷어내고 나니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멀티탭이었다.

'아, 이 아이가 있었지! 세상에!'




컴퓨터가 힘을 쓰려면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한다. 그 공급원은 벽에서부터 시작된다. 공부방은 직사각형 형태라 가구의 배치가 참으로 힘들었다. 이사 오기 전 열심히 짱구를 굴려 봤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벽에 있는 콘센트는 모두 가구로 가려졌다. 벽 콘센트에서 나온 흰색 멀티탭 선, 그리고 그 흰 선과 연결되어 있는 검은색 멀티탭, 그 멀티탭에 꽂혀 있던 갖가지 코드들.





컴퓨터 본체와, 모니터와 씨름할 뿐이었다. 운이 좋아 부팅이 잘 되고, 오류가 나지 않으면 '모니터야, 본체야, 수고 많았다!' 고마움을 표현할 뿐이었다. 늘 눈에 드러난 것들로 희비를 가릴 뿐이었다. 오류가 나고 프로그램이 닫히면 화만 낼 뿐이었다. 어쩌면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에너지를 끌어주던, 보이지 않는 그 아이는 한순간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그런, 몇 푼 주면 집 근처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흔해 빠진 아이라서 그 노고 역시 가벼이 아니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아닌지. 나의 무관심에도 이 아이는 말없이 묵묵히 일을 해내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청소를 하면서 먼지를 닦아낼 때 이 아이를 한두 번 쳐다보긴 했었다.




'우이씨, 이 사이사이에 낀 먼지 봐! 이건 도대체가 어떻게 안 되는 거지?'

그런 생각으로 먼지를 털어 냈을 뿐이었다. 정말 중요한 그 아이의 임무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먼지와 때가 범벅이 되어 도저히 닦아내지 못하면 '이제 때가 되었어!' 생각하며 쉽게 다른 아이로 바꿀 생각이나 하고 있었겠지.




글을 쓰다 보니 USB 연결선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역시나 접촉 불량 상태로 이어질 경우 화만 내기 바빴다.

"왜 제대로 일 못하는데!"

눈에 띄지 않아도, 화려하지 않아도, 인정받지 못해도 묵묵히 할 일을 해내는 존재들이었다. 없어서는 안 될 아이들이었다.




그에 비해 알아보지 못한다고, 관심도 없다고, 인정받지 못해서 억울하다고 불만만 토로하는 나였다.

'그런 너는 조용히, 묵묵히 책임을 다하는 존재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니?'

나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처음 자리를 잡을 때 손길 한 번 받아보고, 그 후엔 먼지나 잔뜩 끼는 애먼 존재로 자리 잡고 있다가, 이사 온 지 2년 만에 주인공의 퇴장 후, 겨우 눈길 한 번 더 받은 멀티탭이었다.




매일 관심을 한몸에 받는 컴퓨터 본체와 모니터 같은 존재가 아닐지라도, 눈에 띄지 않는 흔하디 흔한 존재라고 여겨질지라도 이제는 그리 많이 슬프지는 않을 것 같다. 멀티탭처럼 나 역시 어디선가는 멋진 역할을 해내고 있을 테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내 주변에서 잊고 있었던, 놓치고 있었던 멀티탭 같은 존재를 좀 더 찾아봐야겠다. 그 존재들에게 마음속으로나마 고마움을 전해야겠다. 지금 그대로도 의미가 있다고, 참 멋지다고 한마디 건네고 싶다.




멀티탭을 만나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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