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개의 씨앗을 만나고 싶습니다
날마다 독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 같아선 일주일에 두어 편의 완독기를 당당히 올리고 싶습니다만, 의지도 집중력도 부족한 저이기에 하루 몇 장씩 책을 겨우겨우 넘길 뿐입니다. 완독도 쉽지가 않습니다. 같은 책을 일주일 넘게 붙들고 있는 저에게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병렬 독서를 선택했습니다. 하루는 이 책을, 또 하루는 저 책을 읽지요. 본래 병렬 독서의 의미와는 조금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장을 몇 장 넘기지 못하니 좋은 점도 있습니다. 책 속 문장들이 깊이 다가옵니다. 양이 많지 않으니 내용 또한 제 안에 차분히 자리 잡고 있을 거란 욕심도 부려봅니다.
<질문으로 시작하는 생태 감수성 수업>이라는 책 역시 이런 이유로 제법 오래 붙들고 있는 친구입니다. 아직 1/3도 읽지 못했지요. 꽃 이야기, 곤충 이야기, 동물 이야기, 주제별로 다양한 정보를 아주 쉽게 풀어 준 책이에요. 산책을 하며 나무나 들풀, 새와 곤충에 눈길을 오래도록 주고 있는 저이기에 이 책이 참 포근하고 고맙게 느껴집니다.
이스라엘에서 2,000년 된 대추야자 씨앗 세 개를 발견했는데 이 가운데 하나가 발아해서 자라고 있다는 발표가 있었어요. (질문으로 시작하는 생태 감수성 수업, 68~69쪽)
책을 읽다가 만난 문장이었습니다. 2,000년 된 씨앗이 발아해서 자라다니요.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는 문구가 있어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2009년 경남 함안 성산산성서 발견된 700년 전 고려 시대 연꽃 종자, 일부 씨앗은 발아에 성공하여 이듬해 7월 꽃을 피움 (문화일보, 2023년 8월 14일 문화면)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제일 무능하겠다.'
자연과 마주할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이에요. 매서운 바람이 부는 추운 겨울에도 새들은 앙상한 가지 위에서 한껏 노래를 뽐내고 있지요. 도심의 하천에서 물질을 하는 흰뺨검둥오리는 어떤가요? 하천이 꽝꽝 얼지 않는 한, 유유자적 몸을 동동 띄우고 있어요. 겨우내 두꺼운 외피로 모습을 감추었다가 이듬해 보란 듯이 움트는 꽃눈은 어떤가요? 한없이 연약해 보이지만 그 아이들은 우리보다 훨씬 강하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겠습니다.
2,000년을 버텨온 종려나무 씨앗, 700년 동안 자신의 능력을 품고 있었던 연꽃 씨앗. 검색해 보니 종려나무 씨앗 이야기는 20여 전에, 연꽃 씨앗 이야기는 2년 전에 나온 이야기네요. 그 경이로운 이야기를 저는 2025년이 되어서야 접했습니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갑자기 한 소년이 떠오릅니다. 소년은 3학년 학생으로, 저는 담임교사로 인연을 맺었었지요. 3월과 4월, 소년은 참 힘든 학생이었어요. 지각은 기본이었고 교과서는 스스로 펼치는 일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지각을 하지 않는 몇 안 되는 날에는 학교에 오자마자 친구들에게 말을 겁니다. 다정한 말투가 아니었기에 문제였지요. 다른 친구들은 모두 책을 읽고 있는 아침 활동 시간에 소년은 보란 듯이 교실 앞으로 나와 급식표를 뚫어져라 보곤 했지요. 소년의 행동과 저의 지도는 쳇바퀴 돌듯 늘 반복됐습니다.
저를 향한 소년의 눈빛은 차가웠습니다. 불만도 가득해 보였습니다. 무엇이 소년의 마음을 차갑게 만든 걸까 알고 싶었습니다. 하긴 저는 소년에게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해라!'라고 말을 건넸을 뿐이었네요. 3월이 지나면 교실 안의 모든 구성원은 친밀한 관계가 어느 정도 형성됩니다. 갈등의 상황을 완벽하게 피할 순 없지만 서로에게 관심과 애정이 쌓여가지요. 하지만 소년은 예외였습니다. 저와도 친구들과도 벽이 높아져만 갔습니다.
소년이 달라진 건 리코더를 만나면서부터였어요. 소년은 리코더를 손에 들고 등교했습니다. 교실에 도착하면 음악책을 펴고 리코더를 불기 시작했지요. 소년이 저에게 다가온 건 그때부터였어요. 학년 수준 이상의 운지법을 물었고, 연주를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소년은 저의 응답을 바로바로 흡수해 버리더군요. 친구들도 소년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리코더에 집중하는 모습에, 매일 연습하며 실력이 늘어가는 모습에 모두 기뻐해 주고 축하해 주었습니다. 소년 주변으로 친구들이 모여들었어요. 리코더를 함께 불기 위해서였지요. 자연스럽게 묻고 알려주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소년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소년이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손에 리코더를 들고 등교하는 모습이 위험해 보였거든요. 저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안전을 위해 소년에게 리코더를 하나 더 챙겨 주었습니다.
"하나는 학교에 두고 다니고, 이건 집에서 연습용으로 쓰렴!"
하지만 저의 바람은 소용이 없었습니다. 소년은 리코더 두 개를 손에 들고 등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허무했습니다. 하지만 리코더가 얼마나 좋으면 저리 할까 놀랍고 신기했지요. 흐뭇한 마음은 감춰두고, 어쩔 수 없이 단호하게 말을 건넸습니다. '가방 속에 넣고 다니라고, 그렇지 않으면 리코더를 선생님이 보관할 수밖에 없다고!' 그 설레는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안전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돌아보니 소년은 음악 재능이라는 씨앗을 품고 있었습니다. 리코더라는 친구를 만나면서 그 씨앗이 움트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알코 리코더를 배워 보라고 넌지시 말을 건넸습니다. 여분으로 갖고 있던 알코 리코더를 소년에게 챙겨 주었지요. 십여 년 전 저 역시 리코더란 악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욕심이 앞서 연습용으로도 몇 개 구입했었지요. 하지만 저의 관심은 금방 식어 버렸습니다. 서랍을 정리할 때마다 사용하지 않는 아이들을 처분해야 할지, 그냥 둬야 할지 늘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혹시 모르니까...'라는 생각으로 게으름을 피우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급식실에서 소년을 매일매일 만납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급식실을 나서는 저에게 소년이 늘 다가와 주거든요. "리코더 연습 잘하고 있어? 여전히 재밌어?" 소년은 세상에서 가장 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합니다. "네!" 소년의 경쾌한 목소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에 저 역시 가슴이 설렙니다. 날마다 선물을 건네주는 소년의 등을 두드려 봅니다. "아, 별별이 리코더 연주 듣고 싶다." 그렇게 날마다 소년과 만나고 헤어집니다.
지금 저에겐 만난 지 막 한 달이 되어가는 19명의 학생들이 있습니다. 지난주 미술 시간을 위해 단체 사진을 편집하고 조각내며 19명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한결같이 개성이 뚜렷해 보였습니다. 그들의 눈 속에서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19개의 씨앗을 발견하고 싶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그 씨앗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길 바랍니다. 자신의 씨앗을 발견한 학생들도 분명히 있겠지요. 그렇다면 그 씨앗이 조금 더 움트는 모습을 봐야겠습니다. 분명 씨앗들이 때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2000년 만에 싹을 틔운 이스라엘의 종려나무 씨앗처럼, 700년 만에 꽃을 피운 고려 시대 연꽃 씨앗처럼 좀 더 기다림이 필요한 씨앗도 있을 것입니다. 올 한 해 동안 그 씨앗이 아주 조금이라도 꿈틀거리기를 바라봅니다.
과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결코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소년의 마음과 행동이 움직였듯이 19개의 씨앗들에겐 어떤 영양분이, 어떤 환경이 필요할지 찬찬히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독서 기록을 위해 선택한 책 중 하나였습니다. 짧은 집중력 덕분이었습니다. 이 책을 조금 더 나중에 만났다면 어땠을까요? 아쉬움이 가득했겠지요.
한 달은 정신없이 지나버렸지만 9개월이란 시간이 저에게 남아 있습니다. 다행입니다.
씨앗을 만나서 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