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커피를 만나다

나를 만나다

by 글꽃향기


평일 새벽 5시 30분, 알람이 울리는 시각이다. 이유는 모르지만 알람 소리에 맞춰 눈을 떠 본 적은 별로 없다. 항상 10분 전, 5분 전에 눈을 뜬다. 손을 씻으며 아침을 시작한다. 주방에서 처음 만나는 아이는 정수기, 1L의 물을 물병에 받아낸다. 아침 식사 준비의 시작을 알리는 일종의 의식이다. 물이 받아지는 사이, 식기 건조대에서 큰 접시 두 개를 꺼내 조리대 위에 올려놓는다. 냉장고에서 밤새 잠자고 있던 채소 통을 밖으로 불러낸다. 접시 위에는 당근, 셀러리, 상추가 자리 잡는다.




물병에 담긴 물 1L를 전기 포트에 붓는다. 이어 작동 버튼을 누른다. 잠잠하던 포트는 어느새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한다. 단계별로 소리를 키운다. 그 사이 냉장고에 있던 과일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과와 토마토는 물 샤워로 꽃단장을 마친다. 접시 위 채소 옆에 살포시 자리 잡는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몸이 한자리에 머물 시간이 되었다. 임무를 마쳤음을 알리는 전기포트의 신호에 맞추어 주인공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분쇄된 커피

가늘고 긴 몸매를 뽐내고 있는 드립포트

커피를 품어줄 종이필터와 드리퍼

그리고 모든 결과를 담아줄 서버




2년 전만 해도 네스프레소 캡슐 머신이 아침의 향기를 가득 풍겨 주었다. 영향력 있는 국제적인 대기업답게 캡슐 또한 수거해 주기에, 커피 찌꺼기를 이용해서 재활용 상품을 만들고 있기에 부담 없이, 죄책감 없이 캡슐 커피를 즐겼다. 전기 코드를 꽂고, 물통에 물을 붓고, 원하는 맛의 캡슐만 끼워 주고, 버튼만 누르면 임무는 완료였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맛과 풍미로 준비된 그 아이를 맞이하기만 하면 끝이었다.




그에 비해 오늘의 주인공들은 참으로 까다롭다.




서버 위에 드리퍼를 올린다. 드리퍼에 종이 필터를 무심히 쓱 던져본다. 종이 필터는 무심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드리퍼에 몸을 쏘옥 넣는다. 약간의 물이 전기 포트에서 드립 포트로 이동한다. 드립 포트에 담긴 물은 종이 필터 위에서 원을 그리며 그 존재를 서서히 드러낸다. 서버로 옮겨진 물은 드립 포트에 남아 있는 물과 함께 개수대 아래에서 작별 인사를 고한다.




분쇄 커피의 차례가 되었다. 종이 필터 위에 적당히 자리 잡는다. 시간이 흘러 5~6도의 온도를 내렸을 물이 드립 포트에 가득 담긴다. 종이필터 위로 모습을 한 번 더 드러낸다. 물붓으로 원을 그리며 커피 가루를 촉촉이 적신다. 예고 없는 친구의 등장에 화들짝 놀랐는지 분쇄 커피는 친구를 금방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시간이 필요한가 보다. 30초 정도 지나면 어느새 커피와 물은 하나가 되어 있다. 하나 된 상태로 드리퍼를 통해 서버로 떨어진다. 물 친구의 등장은 두세 차례 반복된다.








주인공들의 고요한 의식을 지켜보는 존재를 잊고 있었다. 종이 필터를 드리퍼 위에 올려주는, 드립포트에 물을 담아 주는, 커피를 종이 필터와 만나게 해 주는 존재. 엑스트라가 있었다. 주인공들의 빛에 가려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엑스트라의 특이한 행동이 하나 눈에 띈다.




오른손으로는 드립 포트를 잡고 있었다. 종이 필터 위에 담긴 분쇄 커피의 반응에 오롯이 집중하고 있었다. 아, 그런데 엑스트라의 왼손이 보이지 않는다. 자세히 보니 그의 왼손은 허리 뒤쪽에 올려져 있다. 손등과 허리가 맞닿아 있는 자세였다. 허리는 곧추 펴고 있었고, 고개는 60도 각으로 기울어져 있다.




2023년 12월, 엑스트라는 커피조리사 2급 자격증 과정에 참여했다. 정말 우연이었던 하지만 시기적절했던 인연이었다. 7년 이상을 함께했던 캡슐 커피가 부담스러워져 커피 머신을 나눔 하고 난 뒤였다. 혹시라도 일을 그만두게 될 경우 -나이가 많아서 과연 현실로 이어질까 의심스러웠지만 - 알바라도 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느끼던 찰나였다. 노후를 걱정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은 엑스트라를 위해 몇 가지 조언을 건네준 후배를 만난 뒤였다. 눈에 들어온 팸플릿, 주민자치센터의 프로그램

"커피조리사 2급 자격증 과정"




핸드 드립 방식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사심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커피를 추출할 수 있을 뿐이었다. 에스프레소 두 잔과, 카페 카푸치노 두 잔을 시간 안에 만들어 내야 했다. 이론 시험 준비와 실기 시험 준비가 함께 이루어졌다. 커피를 몸에 담을 줄만 알았던 엑스트라는 그 시간이 참으로 버거웠다. 매주 2일, 하루에 3시간 30분씩, 총 4주에 걸쳐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선생님은 폭풍 질문을 던지셨다. 답변을 하지 못할 땐 '커피 전문가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걸 모르면 되겠어요!'라며 호통을 치셨다. 엑스트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문제와 답을 달달 외우고 있었다. 필요한 정보를 검색해서 문제 옆에 메모하기도 했다. 실기 시험 동안 이뤄지는 모든 단계를 종이에 써 가며, 연습해 보며, 시간을 확인했고 부족한 부분을 고쳐 나갔다. 동료 앞에서 펼쳐지는 선생님의 호통 소리는 이미 충분히 차고 넘쳤으니까.




1년 3개월이 지나가는 지금, 엑스트라는 무엇을,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을까? 원두를 덜 볶을수록, 분쇄가 거칠수록, 추출 온도가 높을수록, 본인이 즐긴다는 산미 있는 커피에 가까워짐을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커피 잔을 뜨거운 물로 한 번 데워 줘야 추출된 커피의 맛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역시. 그리고... 엑스트라의 몸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선생님의 가르침이 한 가지 더 있는 듯하다.




"왼손 어딨어요? 어디!"

"왜 허공을 헤매고 있나!"

"허리 뒤쪽에 올리라고요!"

"왼손을 허리 뒤쪽에 대면 어떤 느낌이 드나요?"

"고객들은 여러분이 커피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항상 그 자세를 유지하세요. 커피를 귀히 여기는 자세, 고객을 존중하는 자세, 아무도 보지 않고 있어도 그 마음을 유지하세요."




엑스트라는 선생님과의 이별 후, 에스프레소 머신을 만난 적이 없다. 산미 있는 커피를 위해 원두를 분쇄할 때 굵기를 조절할 뿐이다. 전기 포트가 임무를 다한 후, 시간이 지체되지 않도록 주의할 뿐이다. 오른손으로는 드립 포트를 들고, 왼손등은 허리에 고정시킬 뿐이다.




주인공들의 빛나는 향연에도 불구하고 결과물은 매번 달라진다. 엑스트라의 태도가 문제인 듯하다. 물은 시간 차를 두고 적당량 서너 차례 부어야 하는데 조급한지 한꺼번에 부어 버리고 만다. 딴짓을 하면서 주인공들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다. 식어버린 물로 결과가 형편 없어질 때도 있다. 커피는 그런 아이였다. 섬세한 그래서 매우 조심스럽게 그리고 부드럽게 다뤄 줘야 하는 약하디 약한 존재.




엑스트라는 주인공들을 위해 노력할 점을 검색해 본다. 더 갖춰야 할 것은 없는지, 또 다른 문제는 없었는지 점검해 본다. 눈 대중이 아닌 정확하게 계량된 커피의 양도 중요했다. 분쇄 정도에 따라 물의 온도도, 물을 붓는 속도도 고려 대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엑스트라의 정돈된 마음가짐이 중요했다.




엑스트라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고민해 보려 한다. 어떻게 해야 이 섬세한 아이의 마음에 안정을 줄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일관된 자세를 유지할 수 있을지 다짐에 다짐을 더해 본다. 더불어, 때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다른 이의 반응에 따라 휘청거리고 비틀거리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좀 더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마음먹는다.




커피를 만나서 참 다행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