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대신 시누이들과 함께 최고의 크리스마스

심보 곱게 제주 보내주고, 지오디와 함께 20년 전으로

by 현해

11월 14일.

남편이 조심스레 말했다. 12월 25일에 제주도… 2박 3일…….

두 가지 마음이 일었다.

'하필 그 날짜에? 그래도 할 수 없지, 뭐. 크리스마스가 대수인가?'

'그게 무슨 소리야! 일정 조율한 사람 누구야?'

솔직히 말하면 첫 번째 마음이 조금 더 컸지만 일단 두 번째 모드를 발동했다. 우위 선점.


11월 15일.

한 달 열흘을 툴툴거리는 척하다간 내 연말이 뭉개져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하루 만에 마음을 접었다. 면세점에서 립스틱이나 하나 다 달라고 해야겠다. 빠른 포기.


11월 16일.

매일 산책을 하니 하루 100원씩 모으는 것도 나름 쏠쏠하여 캐시워크를 깔아 뒀다.

그런데 하단에 기사 제목 뜨는 건 종종 거슬렸다. 신경 안 쓰면 되지만 보이면 또 궁금하잖아?

그날 보인 기사는 김태우가 예능에 나와서 god 완전체 콘서트 소식을 전한 것. 호오!

평소 TV 프로그램 내용을 요약해서 기사화하는 것에도 회의적이었는데 이게 웬 떡이냐.

싫은 거+싫은 거=좋은 정보.


11월 17일.

지오디 콘서트 날짜나 한 번 검색해 볼까?

어라, 막콘이 크리스마스!! 그것도 부산!!!

HOT 팬이었던 내 친구들을 꼬드기는 대신, 왕년에 하늘색 풍선 좀 흔들었다는 큰 시누 섭외 완료.

예매가 시작된 지 벌써 3주나 지나버려서 VIP석은 연석이 없지만 나름 앞쪽의 R석 2매 획득.

매진이면 어쩌나 걱정했던 나에게는 다행스러운 일.

신랑이 미안하긴 했던 모양. 적극 협조.


11월 18일.

큰 시누만 지오디 팬이 아니었어?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큰 시누랑 중학생이었던 작은 시누가 같이 콘서트에 갔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타지에 사는 작은 시누 접선 시도.

동생이 티켓 쏜다는데 안 갈 리가 있겠냐며 쿨하게 합류.

반대쪽의 R석 3매 다시 예매. 순탄하군.


11월 19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좌석표 모양이 이상하다.

게다가 어째서 그 좋은 좌석이 2매씩, 3매씩 남아있었을까?

알고 보니 우린 앞뒤로 나란히 연결된 표를 구한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한 자리씩 남은 자리가 같은 칸이었던 것.

콘서트에 가 본 적 없다는 남편은 보조무대 이미지를 보고 착각한 것 같단다.

아니면 혹시 8열 5번, 9열 5번, 10열 5번이라는 그 ‘열’ 때문에 헷갈린 걸까?

엄밀히 따지면 8행 5열, 9행 5열, 10행 5열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이건 매번 헷갈린다)

셋이서 손 잡고 공연 볼 것도 아닌데 아무렴 어때. 상관없지.


그러고 5주 동안…

음원 스트리밍 앱에서 지오디 노래 25곡을 골라 한 달간 무한반복.

처음엔 반가운 멜로디에 눈물 날 듯 왠지 울컥했다.

후렴구 정도만 따라 부를 수 있었던 내가 점점 랩 가사까지 줄줄. 나에게 이런 열정이 남아 있었구나.

필요한 건 뭐다? 반복 학습.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선물을 겸하여 남편에게 코듀로이 캡모자를 주고, 하늘색 니트를 받았다.

콘서트 출격 D-1. 준비 완료.


12월 25일.

'하풍봉'을 사기 위해 콘서트 2시간 전에 벡스코에 도착했다.

시누이들과 셋이서만 외출한 건 처음인데 쪼그리고 앉아 건전지 까 넣는 모습을 보며 서로 웃고 열심히 사진도 찍어댔다.

앞뒤로 나란히 앉아서 보는 콘서트도 괜찮았다.

"오빠!"를 외치기엔 쑥스러웠지만 떼창에는 기꺼이 동참했다.

조카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 이모, 숙모의 풋풋한 설렘.

얘들아, 우리도… 놀 줄 안다.


12월 26일.

어제는 휴대폰이 방전됐고 오늘은 목소리가 방전됐다.

찍어 온 동영상과 사진들을 확인하고 형님들과 공유하다 보니 여전히 콘서트장에 있는 듯하다.

지겨울 줄 알았던 곡들을 새로운 마음으로 또, 무한 재생.


12월 27일.

오랜만에 만나 2박 3일 동안 각자에게 있었던 일들을 시시콜콜 나누느라 바빴다.

(결코 입 밖에 내진 않았지만) 그러고 보니, 신랑~

벌써 왔어?




지오디가 데뷔한 해에 고등학교에 입학해 3년 내내 함께 했다.

수능을 망쳤을 때 발표된 곡이 '길'. 반갑지 않았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왜 이 길에 서 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애증의 곡이다. 나에겐 위로가 필요했는데 한 치 앞도 모르는 내 상황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것 같았으니까.


음악은 20년 전의 나를 만나게 했다.

이제는 쪼그라들지 않은 마음으로 '길'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의 나를 충분히 위로해 주었다.


2023년의 길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