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보드게임 '젠가' 해보셨나요?
게임의 특성상 높이 올라갈수록 아랫단에는 빈 공간이 생깁니다. 그래서 위태로울 수밖에 없고 결국은 무너지고 맙니다. 하지만 학습은 그래선 안 되죠. 많이 배우고 진도를 나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빈틈이 생기지 않도록 기초를 탄탄하게 다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인의 빨리빨리 습성은 교육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깊이 파고들어 탐구하기보다는 얼른 다음으로 넘어가야 하고, 남보다 앞서야 하고...
저는 3학년 때 피아노 학원에 처음 갔습니다. 경쟁하는 건 싫어하지만, 다른 친구들은 대회 연주곡을 연습할 때 그제야 바이엘 ‘도레도레도 도레미도레미 미도미도’를 치고 있으니 별 재미가 없더라고요. 차라리 다른 악기를 배웠으면 친구들을 의식하지 않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같은 곡을 무한반복하는 것 자체가 좀 지겹긴 했어요. 꾸역꾸역 체르니 100을 끝내고 30부터는 새 마음 새 뜻으로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하필 손가락을 4 바늘 꿰맬 일이 생겼지 뭐예요. 피아노 학원을 관두고 집에 있는 피아노 뚜껑도 안 열었더니 그 길로 바이바이..ㅜ 따지고 보면 영단어 외우기도 그랬고, 수학 문제 풀기도 마찬가지지만 예체능 과목들은 특히 ‘학(學)’보다 ‘습(習)’이 중요합니다.
아이가 스스로 고르는 책은 만화책이나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것들이 많고, 혼자서는 글쓰기 연습도 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독서토론(논술) 학원에 보냅니다. 그러면 수업 날짜에 맞춰 부랴부랴 라도 책을 읽고 매주 한 편의 글을 쓰니까요. 사실 첨삭이 중요한 게 아니라 꾸준히 읽고 쓰는 행위 자체가 중요해요.
수학 연산도 방문 선생님 오시기 전 날 몰아서 풀어 재낍니다. 그걸 막고자 센터에 매일 가서 학습지를 푸는 시스템이 생겼더군요. 영어학원에서는 숙제 관리가 제대로 안 되는지 하루에 3시간씩 잡아놓고 수업 외에 자습 시간까지 두고요. 아이들이 학원에서 숙제까지 끝내고 온다는데 점점 학원 의존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학원에 가면 공부했다는 느낌이 충만하도록요.
저는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수업을 하는데, 우스갯소리로 “내 수업이 영어, 수학은 못 이겨도 피아노, 미술, 태권도는 가끔 이겨.”하곤 합니다. 모둠으로 진행되는 수업이다 보니 가끔 영어/수학 학원 시간을 조정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건 굉장히 드문 편입니다. 그런데 예체능 과목이랑 시간이 부딪칠 때는 어머님들께서 과감하게(?) 예체능을 포기하시더라고요.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습량이 많아지면서 예체능 시간이 1순위로 사라집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습’이 중요하니 학원에 가지 않으면 혼자서라도 연습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죠. 아이들은 배운 걸 강제로 연습하는 지겨움에서 벗어났다며 신이 나겠고요. 하지만 그동안 기껏 배운 걸 다 까먹는 건 물론이고, 지겨움을 극복하고 엉덩이 힘을 기를 수 있는 기회도 사라지는 거예요.
제가 체감하는 초등 학원계의 갑은 뭐니 뭐니 해도 영어입니다. 그다음은 수학이고요. 하지만 각자의 성향, 능력에 맞춰 가장 우선시할 과목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다양성 아닐까요? 시대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획일적인 교육 운운하냐 싶으시겠지만 현실은 매우 그러합니다.
평소에 영어를 쓸 일이 없어서 안 쓴 지 20년이 훌쩍 넘은 영단어인데 예~전에 외웠던 걸 떠올려 뜻을 툭 내뱉은 적이 있습니다. 역시 뇌가 말랑할 때 빡세게 시켜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바로 떠오른 반박. 수학은 근의 공식조차 가물가물하다는 것! 그리고 40대에 악기를 배우니 지금은 연습의 필요성도 알겠고 느는 것도 보여서 짬짬이 연습을 하게 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원하는 때 하는 게 정답 아닐까 싶어요.
미니멀리즘을 추구하지만 실천하기가 쉽진 않습니다. 이것도 있으면 좋을 것 같고, 저것도 있으면 편리하겠고. 계획 없이 사들이다간 착착 정리되지 않고 너저분해지기 일쑤입니다. 전 요리를 잘 못하지만 주재료에 맞는 적당한 양념으로 맛을 살려야 한다는 건 알아요. 그 어떤 음식에도 모든 조미료가 싹 다 들어가는 경우는 없지요. 영양제나 건강 기능 식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것들이 많지만 이것저것 다 챙겨 먹느라 오히려 간에 무리가 간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 있지 않으세요?
아이들이 다니는 학원은 어떨까요? 영어, 피아노, 미술, 태권도를 기본으로 수학, 과학, 논술 등이 학년에 따라 가감되죠. 여기에 역사, 축구, 줄넘기, 골프, 수영, 방송댄스, 플루트나 바이올린 또는 우쿨렐레 등이 추가되거나 대체되고요.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종류의 학원은 접근성이 좋긴 합니다. 우리 아이에게 하프나 볼링을 시키는 건 앞에서 언급한 학원들을 보내는 것보다 품이 더 들 테니까요. 하지만 남들 다 하는 기본이니까 넣고, 잘하니까 더 시키고, 못하니까 보충하고... 그러느라 특색 없는 과영양 상태인데 제대로 흡수는 못해요. 우리 아이에게 맞게 필요한 걸 채우고, 불필요한 건 과감하게 빼야 합니다. 그래야 숨 쉴 틈이 생기고 효율이 올라가지요. 불안감 때문에 학원을 믿는 구석으로 삼지 마세요.
제가 초등학교 때 비주얼베이직을 배웠고, 고등학교 땐 정보처리기능사 자격증을 땄더라고요. 그런데 '습'은커녕 왜 배우는 지도 모르는 채 시키는 대로 외웠고 지금 기억에 남는 것도 없습니다. 정보처리기능사는 당시에 대입 가산점을 준다는 말이 있어서 친구랑 같이 준비했던 걸로 기억해요.(가산점 받을 생각 말고 당장 내신이랑 수능 점수부터 올려야 한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지만^^;) 당시에 아무 학원도 다니지 않았는데 야자마저 없어져서 시간이 많았거든요. ‘모셔가는 개발자’로 성장할 기회였을까요? 아뇨, 그냥 학원 배만 불렸던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