닦을修: 자존감 회복하는 여정 2

by 소극적인숙

닦을 수(修)와 임수(壬水).

내 사주에는 임수가 있다.

그래서인지 가끔 사람들은

"가운데 '수'는 혹시 '물 수(水)'인가요?"라고 묻곤 한다.

그때마다 나는 "닦을 수입니다." 대답한다.


"아... 닦을 수는 뭐예요? 빼어날 수는 아는데!"

"하하하 좀 복잡해요."

"그렇군요"

이런 식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마무리되며, 이름에 관해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물이 많든, 수련을 하든, 나는 그 뜻을 숙명처럼 여겨왔다.

"언제까지 수련만 할 거예요?" 묻는다면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대답할 거 같다.

내가 개명을 해야 할까.

그렇지만 나는 이름을 바꿀 생각이 없다.

주어지는 의미에 따라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임수를 타고난 기질은 감정이 깊다고들 얘기한다.

타고난 예술가 기질도 발휘한다는데, 글쎄 잘 모르겠다.

입시무용을 다시 시작하면서 나는 선생님께 많이 혼났다.

감정이 부족하다고.

현대무용에 괴리감을 느끼며 어렵게도 참 어렵게도 배웠다.


어린 시절 감정보다는 기술에 앞서 있었던 날, 그저 시키는 대로만 했다.

발레를 배웠으니 어여쁜 표정은 기본으로 장착하고, 요정처럼 가볍고 아름답게만 춤추면 다인 줄 알았다.

시간이 흘러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부모님의 권유로 무용을 그만뒀다.

공부를 쭉 하며 일반 여자고등학교로 진학을 하였는데, 학교에 무용 수업이 있었다.

무용선생님 쭉 지켜보셨는지 다시 시작하길 권유하셨다.


엄마와 함께 수소문하며 찾은 옛 스승님은 내가 현대무용을 하길 원하셨다.

오래 쉬었던 몸이라 원하는 만큼 따라주질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차 성징을 하며 발레에 맞지 않게 체형이 바뀌었다.

어릴 적 발레 하기에 적합했던 나의 엑스자 다리는 세월이 흘러 변했다.

결국 처음부터 다시 배웠다.

그리고 참 치열하게 보냈다.

강남 8 학군에서 내신준비하며, 무슨 깡다구로 무용까지 했는지 모르겠다.


공부를 안 하면 아버지가 무용을 때려치우게 만들 거라며 반 협박도 하셨다.

이쯤에서 그만하고 공부하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마음은 참으로 간절하셨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뒤늦게 발견한 혹시 모를 나의 단 1%의 가능성, 그 재능에 기대한 거다.


신체를 혹사시키며 다이어트하며, 공백에 당부족, 탄수화물이 부족하니 예민함이 넘쳐났다.

빈혈까지 오는데 공부랑 무용을 병행하니 어지러움은 기본이었다.

늦은 시기에 무용의 공백을 다시 채우려 하니 실력이 부족하니 자신감이 떨어졌다.


나는 선수촌에 갓 입성한 국가대표 선수처럼 훈련을 받았다.

떨어진 자신감을 억지로 양으로 채우려다 보니 부상도 있었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수술은 없었다.


나는 유년시절부터 갈고닦으며 수련한 거다.

안 되는 몸을 억지로 따라가려 하니 정말 힘들었다.

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

현대무용은 발레와 많이 달라서 혼란스러웠고,

입시 기간이 다가올수록 창문을 열고 뛰어내릴까 싶을 정도로 부담감이 높았다.

그 부담감을 부모님께 보이면 당장 그만두라고 하실게 보였기에 속으로 끙끙 앓았다.


감정을 다루며 몸을 표현하는 예술이 참으로 고달프게 느껴졌다.

돈을 주고 굶으며 헝그리 정신으로 온몸을 표현하라니.

논리적이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가지다 보니 몸 따로 감정 따로 놀았던 거다.

예술은 왜 이리도 어렵고 심오하고, 내 나이에 맞지 않은 주제로 고뇌하고 표현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스승님이 시키시는 데로, 선생님의 동작 따라 배우고 답습했다.


머리와 몸은 잘 따라가는데 표현이 늘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저 빠르게 두뇌 회전이 잘 되었던

그 어리고 젊은 날, 나의 뇌만 믿고 무용을 했다.

감정도 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


공부가 더 낫겠다며 체육 전과를 받기도 했다.

"SKY 대학교 중 한 곳은 갈 수 있다"는 설득에도 불구하고 내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꼭 무용전공으로 인서울에 갈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라인, 출신, 지역, 그리고 텃세의 벽에 부딪혔다.

예술은 공부처럼 노력으로만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았다.

주관적인 심사, 3분 안에 눈길을 사로잡아야 하는 무대에서 버거웠다.


아마도 스승님은 내가 버티기 힘들 걸 아셨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객관적인 지표가 있는 체육을 추천하셨을 것이다.


주부가 된 이 나이에도 가끔 그런 꿈을 꾼다.

무용을 힘들게 하다가 중도 포기하고 공부하는 꿈을.


꿈속에서 조차 "이건 현실이 아니니 안심해."

"포기해도 괜찮아. 꿈이니 힘들면 그만둬도 돼"라고 속삭인다.


아직도 그 벽은 여전히 남아 있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게 과연 언제부터였을까.

십 대 시절, 전화선에 모뎀을 연결해 인터넷을 쓰며 글쓰기를 좋아했던 거 같다.

그 옛날, 플로피 디스크를 크기에 따라 사용했던 시절이다.


586 컴퓨터를 사용하는 친구집에 방문해서 빠른 속도에 놀랐던 기억.

최신판 게임 CD를 같이 즐기며 했던 날.

우리 집에 와서 486 컴퓨터를 바꿔달라고 떼를 썼던 날이다.


그 친구는 미국에서 잠시 살다가 한국에 들어왔는데, 꽤나 멋지고 어른스러워 보였다.

컴퓨터와 관련된 소프트웨어를 소개해주는 모습은 마치 선생님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가 참 좋았다.

돌이켜보니 참 아득한 옛날 같은데 또 생각해 보면 그렇게 오래된 거 같지도 않다.

아직 오십 년도, 백 년도 지나지 않았으니깐.


그때의 나는 어땠을까.

조금 겉멋이 들고 컴퓨터를 할 줄 안다며.

정보의 바다에 심취했을 때.

나우누리, 천리안, 유니텔, 렛츠고가 성행했을 때다.


매달 일정금액을 지불하고, 인터넷을 사용한 시간만큼 전화요금이 나오며 사용하던 세대이다.

엄마의 눈치를 보던 시절이다.

그때는 그렇게 혼나고도 밤에 몰래 컴퓨터 전원을 켜며, 내가 좋아하는 자료들을 검색했다.

그 기쁨이 넘쳐흘렀던 옛날이다.


없이 인터넷을 켜서 검색을 해보고 온라인에서 많은 사람들과 교류를 해보고 싶었다.

게다가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 음악을 크게 들으며,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 JPG 파일을 무한으로 다운로드하고 싶었다.

어린 나이에 데이터 사용료가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로 작은 파일을 다운로드하였는데 그때는 더 큰 이미지를 하고 싶었다.


훗날 랜선을 설치하고 인터넷 통신망을 개통하며 기가패스가 유행할 때, 나는 그 소원을 드디어 풀었다.


그 뒤로 카페에 가입을 해서 내가 좋아하는 애니 캐릭터 이미지를 다운로드하고 회원들과 공유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약간의 덕후 기질도 있었던 거 같다.


그때로부터 십여 년이 지나고, 성인이 되어 ‘블로그’라는 새로운 세계로 발을 들였다.

마치 독립된 자아가 성장한 듯, 나 자신이 발전된 기분이었다.

블로그 이웃들과 덧글을 남기고 공감을 누르는 게 그때는 재미있었다.

나는 파워블로거도 아니었고, 영향력이 있는 블로거도 아니었다.

그저 온라인상에서 교류를 하는 게 신기하고 좋았던, 조금 부지런한 블로거였다.




그 뒤로 이 십여 년이 지났다.

이젠 '나만의 글쓰기'는 그 시절 기분과 감성을 떠올리게 만들어준다.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었다.

가끔 내가 표현하지 못한 속마음이나 기분 상태, 가치관을 토해내며 글을 쓰곤 한다.

제정신이 아닌 거 같다. 뭐에 씐 듯 그렇게 왜 쓰는 걸까.


이때 나는 쓰면서도 감정의 해소라고 말하지만, 그만큼 속이 불편하고 거북할 때도 있다.

다 뱉어내는 토약질처럼 느껴지면, 그 글을 쓰고 나서도 쓰림이 꽤 오래간다.

장르를 오가며 글을 쓰고 상상하다 보면 가끔 정신이 어질어질 해질 때도 있다.


그럼에도 이 글쓰기를 하는 이유는 나의 신념을 무너지지 않게 잡아주는 끈이 있기 때문이다.


'수련'을 한다면 고통스럽고 힘들고 지쳐야 하며, 진정으로 나 자신과 마주하며 싸워야 한다고 하겠지만, 나는 부족하게도 그렇게 싸울 에너지는 없는 거 같다.


다만 '외유내강'처럼 무르지 않고 부드러우면서 속을 단단하게 내실로 채우고자 하는 게 내 바람이다.

겉은 고요하고 조용해 보여도 호수 위에 떠다니는 백조처럼, 아래에서는 신나게 발차기를 하고 있다.

그 몸부림이 나에게는 글쓰기인 거 같다.


비록 나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대리인 '무당'이 아니지만,

정성을 들여 기도를 하듯, '글쓰기'라는 과정으로 정성을 들여보고 싶다.


'작두'를 타고 '치성'을 드리며, 나쁜 기운은 내쫓고 좋은 기운이 오게끔 소통도 하고 싶지만,

'영매' 없다.


그러니 기대하지 마시기를 빈다.


글을 쓰며 스스로 단련하고, 성장하며, 성한다면 그것 나름 살아가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나에게 ‘글쓰기‘라고 생각한다면 그게 마음이 좀 더 편할 거 같다.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내가 누리는 것과, 많은 자원 속에서 어떤 걸 선택해야 할지 모를 때.

그리고 매너리즘에 빠질 때.

분명 그때보다 풍요로운 거 같은데 마음이 풍요롭지 못하다.

지금은 과거와 다르게 데이터와 인터넷 속도, 요금의 제약도 없다.

그런데 왜 제약이 있던 시절이 가끔 그리운지 모르겠다.



‘자존감을 회복하는 여정 2’ 제목을 정하고

나의 가운데 글자 ‘닦을 수, 수修’써보니 주풀이 해석 상에서 보이는 '도인' 생각났다.


도를 닦는다는 마음으로 참다 보면 인내도 늘어나지만 때론 우울감도 생긴다.

그리고 화병도 난다.

뭔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메커니즘일까.

아니면 나의 사주팔자 때문일까? 이름 때문일까?


인내는 양면의 동전처럼 어둡고 지치는 모습을

보여줄 때도 있다. 견디는 동안 그렇게 난 외톨이가 된다.

'수련'은 고통의 시간처럼 찾아와 고통을 이겨내면 빛나는 순간도 온다.

하지만 나에겐 이기는 것보다는 견뎌내는 것이다.


이렇게 보니 이름 세 글자를 지탱하는 내 그릇이 작아 보인다.


쇠는 닦아야만 빛을 낼 수 있고, 다양한 환경에 노출되면 계속 더 열심히 닦아줘야 한다.

그래야만 녹슬지 않고 단단하게 살아나갈 수 있다.

그런데 난 잘 닦아왔을까.


내 이름 속에 닦을 수는, 숙명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마치 쇠가 녹이 모습처럼 살아온 거 같다. 현실적으로 내가 할 수 없다며.

그런데 얼마 전, 부산의 예술고등학교에서 무용을 준비하던 학생 세 명이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십 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이런 일이 반복된다.


곱디 고운 어린 친구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집중하고 훈련하는 시간만 해도 부족하다.

그런데 어른들 싸움에 아이들까지 포함시켜 왜 힘들게 만든 걸까.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화가 난다. 그리고 내가 죄인이 된 거 같다. 어른인 내가, 엄마인 내가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한 심정 때문이다.

아이들이 감당하기엔 잔인한 세계이다.


어쩌면 나에게 닦을 修가 있는 이유는,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닌, 내부의 단단함에서 뻗어져 나오는 빛을 잃지 않기 위해서까.

그 빛이 내가 선한 영향력으로 비치길 꿈꿔본다.


무대는 사라졌지만, 나는 글 쓰는 무대 위에서 춤을 추고 있지 않나.

다시 시작하고 그래서 느리지만 닦아야만 할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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