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을 수 없는 곳에
'좋은 사람'과 '좋은 사람인 척' 하는 걸 구분하기가 어려울 때, 나는 상대방의 눈을 바라본다.
맑고 다정한 사람은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살아온 세월의 흔적,
거기서 나오는 영롱하고 고운 빛깔이 나의 시선을 머뭇거리게 만드는 사람.
이건 나만의 촉이자 주관적인 기준이다.
사람마다 자기만의 기준이 있겠지만,
열 중에 여섯 이상은 성공한다면 꽤 그럴싸하지 않은가.
나는 힘들면 걷다가 쉬고, 잠시 사색도 하고, 풍경을 바라보며 고요히 휴식을 가지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어쩌면 재미없는 사람, 에너지가 떨어지는 사람으로 보일지도. 다정함과 점점 멀어진다.
적당히 현실에 타협한 듯 보이지만, 아직까지 나는 속으로 머리로 끊임없이 상상한다.
결국 나의 저항은 상상으로 변질되어, 빛 좋은 개살구가 된다.
만약 의지할 곳이 없고,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으면 더 좋은 그림, 그것보다 더 좋은 음악을 들으며 감상한다.
왜냐하면 나의 '신'은 이미 떠난 듯 보였기 때문이다.
잠시 머물다가 간 것처럼, 그분도 다른 사람을 통해 주저앉을 자리가 필요했던 거 아닐까.
사람도 마찬가지로 힘든 상황이 한꺼번에 다가오면 기댈 곳이 필요하다.
우리가 기대고 의지하는 것은, 한정된 '유한하다'에서 뿌리를 찾아 그 속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보는 주의다.
그것이 경제적 지불이 되었든, 또 다른 대가를 지불하거나 또는 도움을 통해 주고받더라도 유한해야 한다. 벼랑 끝에 있어도 우리는 대가를 줘야 한다.
'선의'도 있지만 그것은 영원하지 않다고 본다.
좋은 뜻을 가지며 다가온 배려나 의도는 받는 입장에서 처음은 좋을 수 있다. 하지만 '선의'가 쌓이면 당사자 또는 상대방에게는 또 다른 의도가 생긴다.
그 의도가 '기대'로 바뀌게 되며, 우리는 그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때로는 불필요한 에너지를 쓰게 된다.
나는 그 불필요한 에너지를 주고받는 게 어색하고 힘들다.
사람은 약하지만 강한 존재라고,
때로는 신도 없이 나 자신에 대한 강한 신념으로 살아가라고들 이야기한다.
하지만 조금 힘들어지고 의지가 약해지면 또다시 기대게 되지 않는가.
종교적 신념이라며 의지를 하게 되고, 다양한 신앙을 통해 원인을 찾고 해결하려 한다.
나중에는 미래적인 계획을 세우지만 결국 그때 가봐야 알게 된다.
그 선택이 옳았는지, 아니면 잘못된 선택이었는지를.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걸로 끝나면 개운치 않으니 뭐든 찾게 된다.
닿을 수 없는 곳에, 아득히 멀리 있는 느낌이 들수록 더 광적으로 매달리게 될 때도 있다.
가끔 닿을 수 없는 사람, 인연이 전혀 없는, 최애의 연예인이나 배우가 나왔을 때는...
원 없이 나의 희로애락을 펼친다.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마치 알았던 사람처럼.
의지를 하고 눈물을 흘리고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으면
꿈에서라도 그 감정이 해소된다.
신적인 존재라고 느꼈던 사람이 꿈에 나타났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따뜻한 말로 위로를 해주고 함께 울어주면, 나는 거기에 대한 예의를 갖추면서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지한다.
나는 신에 대한 구원을 바랐던 게 아니다.
그저 따뜻한 위로, 말없이 다가와 안아주는 존재가 필요했다. 그걸 빌미 삼아 신이 필요하다며, 수호신을 찾았던 게 아닐까.
세상에는 더 좋은 신이 많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싶다. 시끄러운 이 세상에서 나도 기댈 곳이 필요하다.
형체로 된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당분간은 나의 '수호신'은 음악을 담당하는, 그리고 책을 담당하는 '신'이기를 기도해 본다.
눈으로 보질 못하니, 형체에 깃들어 있다고 생각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