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그 책 여러 번 읽었어.", "나 그 영화 수십 번 다시 봤어." 그런 말을 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나는 한 번 끝까지 읽거나 본 책이나 영화를 다시 보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의 감정은 남아 있어도 스토리는 잘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등장인물의 이름조차 까먹은 적이 많았다.
물론, 시도를 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지만 내게는 쉽지 않은 시간으로 기억된다. 돌이켜보면 그런 이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던 것 같다. 하나는 이미 결말과 대강의 스토리를 알기에 흥미나 관심이 떨어진다는 것. 다른 하나는 처음 보고 읽었을 때의 긍정적인 충격을 간직하고 싶다는 마음.
첫 번째 이유는 내 성향이 그래서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렇게 오만할 수가 없다. 그 한 번의 감상으로 얼마나 완벽히 알고 이해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더더욱 그렇다. 그저 '이건 이미 봤던 건데, 뭐.' 하고 속으로 판단해 버리고선, 어쩌면 오해하고 있을 부분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채로 계속 지내게 되는 것이다.
특히, 그렇게 본 영화나 읽은 책에 대해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면 더 가관이다. 여러 번 감상을 마친 그 사람은 당연히 나보다 더 깊이 있고 풍부한 얘기를 하는 데 반해, 나는 다소 겉돌거나 표면적인 얘기만 늘어놓으며 대화의 대부분을 맞장구치는 일에 할애한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두 번째 이유는 그래도 감성적인 부분이라 조금 이해는 된다. 하지만 책이나 영화 같은 콘텐츠도 한 명의 사람이고 관계로까지 생각을 넓혀보면 또 이상한 행동이 되어버린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처음 만난 뒤, 그 첫 만남이 너무 좋았서 이 감정을 간직하려고 다시는 이 사람을 안 본다? 이런 미련한 사람이 있을까? 하는데 거울 속에 있다. 이런...
이런 현상의 근원은 내가 늘 새로운 것을 원하는 사람이라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새로운 감정과 새로운 경험, 새로운 사람 등 새로움을 갈구하다 보니 익숙함과 같은 단어를 등한시하는 게 아닐까. 정말이지 도파민형 인간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나를 변화시켜 보고자 나름의 방법들을 연구하고 연습해 왔다. 읽었던 책을 다른 장소에서 읽어본다던가 아이패드로 봤던 영화를 노트북으로 다시 본다던가 하는 식으로. 예상했다시피 효과는 없었다. 그러다가 그나마 내게 적용해 볼 한 가지 규칙을 찾아냈다. 바로 이 책이나 영화를 본 적이 있지만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보는 방법이었다.
이 방법을 써본 뒤에야 나는 친구들이 여러 번 봤던 영화를 보고 읽었던 책을 또 읽는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안 보이던 것도 보이고 새로운 감정도 느껴지며, 이걸 처음 봤을 때의 나도 함께 생생히 기억할 수 있었다. 그 경험은 독특했다. 몇 년 후에 똑같은 글이나 영상을 똑같은 자세로 보고 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내가 어떤 시간을 지나왔는지 느낄 수 있었다.
요즘은 물리적으로도 기억력이 많이 떨어져서 더 자주 보는 일이 많아졌다. 건망증이 의심될 정도의 하루를 자주 보냈는데, 그 망각이 도파민형 인간인 내게 도움이 되는 것도 같았다. 늘 새롭고 짜릿하니까. 아무리 그래도 어제 생일이었던 친구에게 생일축하 연락 보내기를 깜빡한 건 좀 너무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