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그냥 연기 그만둘게요.”
연예계 생활 금지.
위약금 조항 준수.
회사 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있었다.
관계를 잃지 않으려 했던 그 선택의 대가를
나는 오랜 시간 마음으로 치렀다.
좁은 시야에 가려진 진실들,
실체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던 무지한 시절.
계약서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마음의 긴 터널을 지나고 있던 시간,
나를 끝까지 붙들어준 건
의외로 멀고도 아주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네가 얼마나 더 좋아지려고 이러는 걸까.”
바닥인 줄 알았는데 지하까지 내려온 것 같다며,
끝없는 자기혐오로 스스로를 학대하던 시간들.
그때 친구가 건넨 한마디가 가슴 깊은 곳에 박혔다.
그 말은 나를 일으켜 세우기보다는
더 이상 무너지지 않게 붙잡아 주는 힘이었다.
“괜찮아? 볼 때마다 살이 빠지는 것 같아.”
“네가 너무 걱정돼.”
“해줄 수 있는 건 없지만 그동안 잘 해왔듯
언니가 잘 이겨낼 거라고 믿어.”
주변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마침내 긴 터널의 끝자락에 다다를 무렵,
용서를 구하고 회사에 다시 돌아온 지 이틀째 되던 날,
한통의 연락이 왔다.
“지금 오디션 볼 컨디션 되니? “
“네. “
“그럼 하나 보러 가자.”
바뀐 담당자분들과 함께 간 낯선 오디션장.
감독님이 꺼내신 한 마디.
"진행 중인 다른 스케줄은 없어요?"
"네, 없어요."
"그럼 됐다."
그렇게 그날, 바로 캐스팅이 됐다.
그토록 바랐던 첫 공중파 데뷔.
눈을 떠보니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이루어져 있었고,
가장 깊은 어둠 끝에서 기적이 찾아왔다.
아픈 시간을 지나며 나는 자신과, 내 곁의 다정한 얼굴들을 만났다.
그 당시 나의 일기장에는 이런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어떻게 될지 몰라서 너무 불안하다.'
'전 작품이 연기의 유작이 아닐까?'
'이 작품도 혹시 유작이려나?'
고민에게 여지를 주고,
그 고민에게 또 다른 고리를 걸며
끝없이 불안 속을 헤매던 시절.
그 촬영은 나에게 하나의 큰 도약이 되어준 작품이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수많은 스태프들이 함께하던 촬영장,
처음으로 이름이 주어진 역할,
처음 손에 쥐어본 쪽대본.
얼마나 쓰다듬고,
얼마나 소중히 품에 안았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때 함께 출연했던 한 친구의 말이
지금까지도 내 마음에 깊이 남아있다.
"나는 최선을 다했어.
그리고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
"기대하지 않으면, 내게 다가오는 행복이 더 커지잖아.
기대하지 않는 게 어려울 뿐이지,
난 행복을 더 크게 느끼고 싶어서 기대하지 않으려고 해."
약속의 힘은 위대하고,
희망고문은 참담하다.
누군가 우리에게 정량의 노력을 하다 보면
반드시 결과가 온다고 확실히 약속해 주었다면,
나는 그 약속을 쟁취하기 위해 기대하며 달려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가는 일은
어떤 것보다도 불안하고 흔들리기 마련이다.
특히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수록,
어둠이 더 짙게 드리운 곳이라면
그곳은 더 빨리 벗어나고 싶은 구간이 될 것이다.
이제는 분명히 안다.
폭풍우가 몰아칠 때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고요히 숨을 고르며 마음의 중심을 지켜내야 한다는 것을.
어둠이 가장 깊었을 때일수록
묵묵히, 그러나 분명하게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끝까지 버티고 지켜낸 사람만이
그 결과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나의 성취는 나 혼자의 발자국이 아닌,
나를 믿어주던 그들의 응원이 등불이 되어
밝혀준 길이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사람이 사람을 살리고,
사람이 사람으로 완성된다.
그들의 사랑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터.
오늘도 내 곁을 지켜준 모든 이들에게 조용히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