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 어디 계세요?"
"... 제가 대표인데요."
계획은 없고, 용기만 있었다.
스물여섯, 나는 화장품 사업이라는 신대륙을 탐험하기로 했다.
갑작스레 웬 사업이냐고 묻는다면, 이유는 단순했다.
프리랜서 배우의 삶은 늘 '불안정'과의 싸움이다.
언제 잡힐지 모르는 오디션과 촬영을 기다리다 보니
일반적인 직장생활은 불가능했다.
내 귀의 얇기는 0.1mm쯤 되려나.
어느 날, 나의 얇은 귀를 자극하는 말이 들려왔다.
"화장품 모델도 많이 해봤으니까, 직접 한 번 만들어보는 거 어때? 요즘 괜찮다던데."
그 말 한마디에 막무가내 정신이 발동되었다.
내가 직접 쓸 화장품은 달라야 한다는 생각에 화장품 전문가 자격증을 따고,
직접 개발을 위해 원료 공부로 밤을 지새웠다.
드디어 잡힌 첫 미팅.
밤새 작성한 연구계획서를 들고 업체로 향했다.
최대한 정중해 보이려 차려입은 옷의 매무새를 가다듬고
크게 숨을 고른 뒤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하지만 돌아온 건 탐탁지 않은 시선.
최소주문수량이 작다는 이유로 만들고 싶은 제품에 대해 만들어간
공들여 준비한 ppt와 연구계획서는 이미 저 구석에 위치해 있었다.
어려 보이는 얼굴, 여성 사업가.
"대표님은 어디 계세요?"
"... 제가 대표인데요."
명함을 드렸음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명함과 나를 번갈아 보던 그의 눈빛에는 '어린애 장난'이라는
말이 또렷이 적혀있었다.
제품에 대한 피드백을 자세히 전할 때마다 귀찮다는 듯
"그건 안 된다."라고 잘라 말하는 연구원에게 결국 참았던 화가 터졌다.
"연구비 목적으로 돈을 지불했는데 개발을 못하겠다는 게 말이 되나요?"
"그런 곳에서 연구할 생각 없으니 그럼 당장 환불해 주세요!"
말을 뱉고 나서야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사회 초년생으로 마주한 첫 분노와 떨림의 순간.
이 순간을 통해 알게 됐다.
나는 생각보다 '요구'에 서툰 사람이었다는 걸.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 그건 좀 어렵고요.
그럼 원하시는 대로 만들어볼게요."
허무할 정도로 순순한 항복이라니.
사람 일은 알 수 없다더니, 결국 내가 원하는 제품을 만들어준 곳은 바로 그 업체였다.
하지만 진짜로 버거웠던 건 과정이 아니라, 마케팅이었다.
1인 사업으로 제품 개발부터 홍보까지 도맡다 보니
본업인 배우 활동에도 지장이 가기 시작했다.
사업이란 본래 모든 것을 쏟아도 모자란 일인데,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내겠다는 생각은
욕심이었음을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회사의 성장을 위해 신제품 개발과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연속성을 구축해야 하는 순간 속,
나는 배우라는 꿈을 더 분명히 하기 위해 결국 멈춤을 선택했다.
그렇게 나의 화장품 사업은 짧은 역사를 남긴 채 막을 내렸다.
1년간 애정을 쏟아온 만큼 보내주는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 시간을 실패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끝까지 하지 않았기에 실패가 아니라,
의미 있는 멈춤이었을 뿐이니까.
무모했지만 그만큼 무거운 도전이었고,
그래서 더 많은 배움이 남았다.
어디서도 기죽지 않는 태도,
열정의 온도를 스스로 증명하는 방법,
타인의 시선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쉽게 무시당했던 모든 순간들이
결국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작가의 한 마디]
이 이야기를 읽는 누군가도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꿈 앞에서 망설이고 있다면,
완벽한 준비를 기다리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실패해도 괜찮고, 잠시 포기해도 괜찮다.
내가 실패라 부르지 않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실패가 되지 않는다.
깊이를 재지 못한 채 뛰어든 순간들이
나를 망가뜨리기보다 오히려 나를 만들어주었다.
서툴러도, 무모해 보여도 한 번쯤은 온몸으로 부딪혀본 사람만이 자신의 쓸모를 알게 된다.
멈춤은 끝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가장 솔직하게 마주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오늘도 실패라는 이름 대신 과정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법을 배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