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 노래와 춤 준비해 주세요.'
문자를 받고 내 눈을 의심했다.
'나 연기로 오디션 본 거 맞아..?'
알고 보니 방송사에서 진행하는 상당히 유명한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부른 것이다.
아무리 한 때 춤을 췄다지만 이렇게 까지 될 줄은 몰랐다.
노래는 더욱이 잘 못하는 탓에 한 때의 즐거운 해프닝으로 남기로 했다.
새로운 마음으로 연기를 배우기로 다짐하며,
연기학원을 다니기로 결심했다.
오디션으로 쏘아 올린 작은 공이었지만
나에게 연기라는 꿈이 생겼다.
그동안 마음속에 부끄러워 꽁꽁 감춰두었던
기억 서랍을 열어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기억서랍을 열어버린 대가로
나는 옆을 볼 수 없는 저주에 걸린 것만 같았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가 되어버릴 줄이야.
간호학도로서 실습을 하며
연기학원을 다니는 것은 생각보다 벅찼다.
사실은 연기를 떠나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봉인되어 있던 나의 마음을 열어버리니 세상이 넓어진 것만 같았다.
그러려면 내 몸을 포기해야 하는 법.
리포트를 쓰며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아르바이트와 과외를 하며 2시간씩 자기도 하고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겠다며 1년 간 의료봉사도 하며
새벽에도 실습에 늦을까 벌떡벌떡 일어나며 언덕길에서 구르는 순간들에도
나에게 반짝반짝 빛나는 꿈이 있었기에 모든 순간들이 행복했다.
그만큼 간절했고 꼭 카메라 앞에 서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한 연기는 화려할 것만 같았다.
드디어 시작한 연기.
어느 날,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대본리딩에 왔다.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한다고 연습해 온 현장에서
왠지 모를 조용함과 어디선가 들려오는 한숨소리를 들었다.
"여기 이 부분 다시 해보세요."
"아 그 느낌이 아닌데."
"다시."
"다시."
"다시."
"하..."
"옆에 남자배우가 해주세요."
"아! 답답해! 이렇게 하면 된다니까요?"
"하... 일단 저희끼리 회의 좀 하고 올게요."
아... 망했다.
그들은 대체 뭘 원하는 것이고,
나는 대체 뭘 놓친 것일까.
얼굴이 상기되고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피디님들이 밖에서 회의를 하고 온다며 나가계셨던 그 시간이
고무줄을 내 이마에 걸고 팽팽하게 당겼다가 놓을 것만 같던 시간이었고,
결국 다시 진행됐음에도 아슬아슬했던 촬영이었다.
불안한 시작과 동시에 스스로도 부족함을 느꼈고
내가 부끄러웠던 시간 속에서도 '성장'이라 생각하려 했다.
이렇게 갈고닦아나갈 실력이 곧 나의 무기가 될 테니.
그럼에도 나를 상처 주는 말들에는 의연해지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나는 너를 뽑고 싶지 않았어."
"연습해 온 거 맞아?"
"피겨 했으면 다리에 알 있는 거 아니에요?"
"그쪽 얼굴이 비대칭이라 수술해야 할 것 같은데."
"그냥 백의의 천사나 해요."
이 외에도 수없이 무너지게 했던 말들이 많았다.
이제는 정말 많이 들어서 타격감이 없어졌지만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을 잊지는 못했다.
그깟 카메라가 뭐냐고?
카메라는 보다 많은 것들을 담는다.
사람을, 사물을, 풍경을 바라보는 인물의 표정과 시선
그 모든 것들이 내는 크고 작은 소리들
공간의 온도까지 생생하게 담겨있다.
그 시절의 나를 담는 하나뿐인 도구
내 삶, 내 꿈, 내 행복쯤이라고 설명하면 되려나.
마음속에 꿈이라는 것을 품고 경주마가 되어버린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연기활동을 혼자 활동하기 어려운 지점에 다다랐을 때 소속사와 계약을 했다.
‘이 날만을 기다렸어!’
돌아오는 길에 도장 찍은 계약서를 몇 번이고 껴안고 기뻐했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누군가의 차를 빌려 타지 않아도 되고,
혼자 열심히 프로필을 돌리러 가지 않아도 된다.
한참 열기를 띄우며 매일 9시마다 영화사에 찾아가
"안녕하세요! 제 프로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라며 인사를 해서 겨우 오디션을 봤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는 이런 것들을 하지 않아도 된다니.
함께 하는 식구들과 좁은 차 안에 타서 돌아다닐 때는
사람의 온기가 주는 행복이 차를 가득 메웠다.
그러나 소속사에 들어와 약 1년 간 일했을 무렵,
소속사와 분쟁이 생겼다.
그리고 이사님께 던진 폭탄선언.
“저 연기 그만둘게요.”
[작가의 한 마디]
살다 보면 원치 않는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럴 때 내가 하는 방법은 로그아웃이다.
생각의 뇌에서 로그아웃하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면 무뎌질 말들인데
잊히지 않는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
가끔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맴돌 때 머리를 톡톡 두들기며 한 마디를 한다.
부정의 기운을 없애기 위한 하나의 문장.
“로그아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