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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담 Sep 13. 2023

미쿡에서 온 부자 할머니는 왜 고시원에 살까요?

  일주일 만에 고시원으로 출근한 날이었다. 한두 시간 내에 얼른 일을 마치고 점심시간 맞춰 퇴근할 계획이었다. 오랜만에 근교로 좀 나가서 맛있는 점심도 한 끼 하고, 분위기 좋은 카페도 가볼 요량이었다.


  오늘은 어떤 메뉴를 먹을까? 어떤 핫플레이스에 가볼까? 머릿속으로 행복한 상상의 노래를 부르며 바삐 움직였다. 각종 분리수거와 쓰레기, 어지럽혀진 복도와 주방을 정리하는 것이 잡스러운 일처럼 느껴져 짜증이 밀려왔지만, 맛있는 음식으로 우리의 노동력을 치하할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렇게 몸 쓰는 일을 한바탕을 하니 입맛이 더욱 돌았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생각에 이미 아드레날린이 머리 끝까지 차오른 상태였으므로, 고시원을 나서는 우리의 동작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재빨랐다. 그런데 그때, 저 아래 계단 밑에서 누군가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막 문단속하고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배고픈 노동자에게는 영 반갑지 않은 타이밍이었다.


"익스큐즈미...?  할로..? 원장님 계시나요..?"


  익... 익스큐즈미? 할로? 이건 또 뭔 소린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하며 낯선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동그랗고 부드러운 얼굴형에 짧은 숏컷트. 썬글라스를 무심한듯 콧등에 툭 걸친 한 노년 여성의 실루엣이 보였다. 보아하니 연세는 우리 시어머니쯤 돼 보였다.


  "네,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죠? (혹시 잘못 찾아오신 건 아닐까.. 할머님이 왜..?)"

"어머어머~ 마침 계셨군요 다행이네요.  제가 잠시 stay~ 할 곳을 찾고 있거든요. 좀 둘러봐도 될까요?"

"아... 네... 혹시 어느 정도 stay~ 할 예정이신지요...?"

"음.. 3 months."

"네.. 일단 지금 넓은 방은 만실이라 보여드릴 수 있는 방이 없고요, 작은 방만 남아있는데 괜찮으실까요?"

" Of course!! 물론이죠. 어느 쪽으로 가면 될까요?"


  우리 고시원에 노인이라고는 슈퍼맨 어르신 한분뿐이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노년의 여성분께서 문의를 주시거나 찾아오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하필이면 남편과 빠른 퇴근 후 데이트를 즐기러 나가려던 그 순간, 예상 밖 등장인물이 훅- 들어온 것이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고, 예상치 못한 전개에 적잖이 당황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나이와 달리 남다르게 우아한 패션센스와 외국어가 뒤섞인 스마트한 말투의 할머니라니. 도대체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일단 손님께서 방을 보여달라고 하니, 보여주기로 했다. 남편은 본인 기준에서 최대한 무성의한 태도로 작은 방과, 공용주방, 공용 세탁실, 옥상 등을 안내해 주었다. 본인은 아주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고 착각했겠지만 태생이 친절하고 부드러운 남편의 응대를 보고 있자니 노년의 여성분이 덜컥 계약한다고 할까 봐 오금이 저려왔다.


  노년의 여성, 그러니까 흔히 우리가 할머니라 부르는 사람을 손님으로 받고 싶지 않은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었다. 가장 큰 걱정은 건강과 안전문제였다. 우리는 매일같이 출근하지도 않을뿐더러, 조심성이 많기에 피할 수 있다면 1%의 리스크라도 피해 가고 싶었다. 더욱이 우리 고시원은 남자가 대부분이며, 그나마 한 분 계신 어르신 또한 슈퍼맨이라 불리는 괴상한 노년의 남성분이었다. 엘레강스한 노년의 여성분이 오셔서 잘 적응하실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이 들었다.


  두 번째 이유는 젊은 여성은 손님으로 상대해 본 적이 있지만 우리들 어머니와 연배가 비슷한, 그러니까 엄마뻘 되는 입실자는 전혀 상대해 본 적이 없기에 그녀의 행보가 잘 예상되지 않았다. 지내시면서 어떤 민원사항이 발생할지, 민원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대응을 해주는 게 좋을지 머릿속에 축적된 데이터가 전혀 없다는 점이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한국인이 분명한데 영어를 유창하게 쓰시는 걸로 보아 고시원에 머무르게 된 어쩔 수 없는 특별한 사연이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원체 우여곡절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곳이라지만, 플러스 알파로 노년의 여성이라는 점은 추가적인 걱정과 우려를 사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그때,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할머님이 매우 흡족해하시며 당장 계약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 방을 팔았다면 응당 기뻐해야 마땅한 일이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조심성 많은 남편이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입을 떼었다.


  "저 어머님~ 근데 연세도 있으신데 사실 방이 좁기도 하고, 저희는 엘리베이터도 없어 계단도 많아서요. 생활하시기에 불편하지 않으실까요.....?  더 시설 좋은 쪽이 있으시면 그쪽으로 가셔도 괜찮습니다. 급히 결정하지 마시고 좀 더 둘러보시고 오셔요. 무릎 건강에도 안 좋으실거 같고 행여나 넘어지시기라도 하시면..."

남편다운 회유였다. 당연히 60년 이상 산전수전 공중전 겪으며 살아온 이 손님에게 먹힐 리 없는 멘트였다.


  "아이고 사장님,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이 정도는 거뜬하게 오를 수 있지요. 지금 지내는 곳은 개인 화장실도 없고 영 불편해서요. 무엇보다도 저는 친절한 사장님이 가장 맘에 드네요."

"네..? 아... 네네. 감사합니다. 근데 저희 고시원은 젊은 친구들이 대부분이고 비슷한 연령대의 입실자분은 딱 한 분밖에 안 계시거든요. 하필 또 남성분이세요. 불편하실까 봐 미리 알려드려요......"

"어머~~ 나 젊은 친구들 너무 좋아해! 그런 mood 아주 맘에 들어요!" (헉.. 이게 아닌데!?)

"아......  그런데 저 혹시 외국에서 오신 것 같은데 고시원에 꼭 묵으셔야 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실까요? 저희가 만일 어떤.... 예상치 못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안 돼서... 실례를 무릎쓰고 여쭤봅니다."

"아 그러니까 그게... "


  내용인즉슨 원래 거주지는 미국이시고 가족분들 또한 모두 미국에 계시는데, 어떤 예기치 못한 소송에 휘말려 재판을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동안 머물 곳이 필요하고, 엄연한 한국인이지만 한국 국적이 아니라서 재판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다고도 했다. 그런데 이런 복잡한 상황 설명을 듣는 내내 나도 모르게 자꾸만 할머님의 손목에 눈길이 갔다.


  왜냐하면 무시무시한 롤렉스 시계를 차고 계셨기 때문이다. 몽클레어 청년이 차고 있던 그 브랜드! 롤렉스!  직장 다니고 고시원까지 운영하면서 나도 아직 한 번도 사본 적 없는 롤렉스였다. 고시원에서 지내실 분은 정말 아닌 것 같은데 어쩌다가 우리 고시원까지 오시게 된 걸까? 한 인간에 대한 호기심과 연구 본능이 활화산처럼 솟구쳤다. 점심 메뉴를 상상할 때와는 또 다른 종류의 아드레날린이었다.


  여하튼 남편의 끈질긴 회유를 뒤로하고 이 엘레~강스한 노년 여성은 기어코 입실 계약서를 쓰고야 말았다. 이제 우리 고시원에는 슈퍼맨 할아버지와 함께 또 한 분의 미스터리 한 여성 어르신이 생겼다. 한 가지 추가 특이사항은 비상연락망에 자식들 전화번호는 절대 쓸 수 없다고 하신 것 정도였다. 대신 할아버지 연락처를 쓰셨고, 몇 주 후 할아버님이 잠깐 한국에 들어올 예정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좋은 친구가 생긴 것 같군요.”

할머님은 그날의 계약을 이렇게 한줄평으로 정리했다.


 과연 이 미쿡에서 오신 노년의 여성분은
우리 고시원에서 잘 지내실 수 있을까.....?


우린 정말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미쿡에서 오신 할머님의 고시원 에피소드는 두 편으로 나누어 연재합니다.  


다음 이야기도 기대해 주세요.^^


개인적으로 아주 Cool하고 따뜻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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