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명함, 그 달콤한 무게에 가려진 나의 이름

by 진담

제 1화


“엄마, 나는 커서 치과의사가 될 거야.”

다섯 살 둘째가 선언하듯 말했다. 나는 젓가락을 든 손을 잠깐 멈췄다. ‘의사’라는 단어의 무게를 알아서가 아니었다. 그 말을 내뱉는 아이의 얼굴이 너무 당당해서, 그리고 그 당당함이 어쩐지 부러워서였다.

“그래? 뭐가 되든 네가 행복하면 돼. 그런데 치과의사도 너무 좋다.” 나는 괜히 덧붙이며 웃었다. 들뜬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웃음은 삼켰지만, 입꼬리는 쉽게 내려오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딸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말했다. “엄마, 나 치과의사 말고 빵집 사장님 할래.” 하루짜리 꿈이었다. 그 다음 날엔 장난감 가게 사장님이 되었고, 또 다음 날엔 다른 무언가가 되었다. 아이의 꿈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뀐다. 왜 그 꿈을 선택했느냐고 물으면 대답은 늘 비슷하다.


“재밌을 것 같아서.”

“멋져 보여서.”

“그냥 좋아서.”


이유는 늘 단순하고 명확하다. 그렇다면 어른들은 어떨까.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쉽게 꿈을 말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내 주변을 둘러보면,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친구들은 수능 점수에 맞춰 대학을 갔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누구나 알 만한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이 꿈이라고 믿었다기보다 그렇게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해 보였기 때문이다.


재밌어서도, 좋아서도 아니었다. 남들이 다 그렇게 사니까. 안정적이고 비교적 높은 연봉이 보장되니까. 나 역시 ‘꿈’ 대신 ‘안전 경로’를 선택했다. 어릴 적 나는 텔레비전 속 9시 뉴스에 등장하는 여자 앵커가 되고 싶었다.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세상을 설명하던 그 모습이 유난히 위대해 보였다. 한때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승무원을 꿈꿨고, 또 한때는 세계 곳곳의 호텔을 운영하는 호텔리어를 상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평범한 직장인 워킹맘이다. 회사 생활은 내가 상상하던 삶과는 정반대다. 자유롭지도 않고, 멋져 보이지도 않으며 그다지 흥미진진하지도 않다. 이미 서른 초반 무렵, 이 옷이 내 몸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쉽게 벗을 수는 없었다.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 각종 복지 혜택, 그리고 ‘대기업 직장인’이라는 명함. 그것은 꽤 그럴듯한 간판이었고 안온한 마취제였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자 회사는 더 이상 선택지가 아니라 필수가 되었다. 늘어나는 대출 이자와 교육비, 생활비. 카드 명세서를 마주할 때마다 사직서는 다시 서랍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그렇게 안정이라는 이름의 달콤함에 취해 10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고, 어느새 나는 마흔이 되었다. 그 사이 세상도, 회사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50세쯤 되어야 희망퇴직 이야기가 들렸는데, 이제는 내 또래의 이름도 리스트에 오른다. 중년 퇴직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된 세상이다.


무엇보다 중대한 것은, 마흔이라는 이 애매한 타이밍에 진짜 내가 원하는 삶과 일의 모습은 흐려진지 오래라는 점이다. 회사라는 시스템에 온전히 기대어 살아왔지만, 무방비 상태로 언제든 밀려날 수 있는 위치.

냉정하지만 그게 오늘의 현실이다.


나는 종종 이런 장면들을 목도한다.


어제까지 함께 일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텅 빈 자리만 덩그러니 남는 모습. 퇴사 후 경력 단절을 겪으며 “내가 이렇게까지 약했나”하며 우울감에 빠진 목소리. “대체 내가 좋아하는 일은 뭐지?" 고민하는 엄마들. 연봉 1억이 넘던 사람이 퇴사 후에는 회사 밖에서 월 100 원만이라도 꼬박꼬박 버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는 아이러니들.


아무런 준비 없이 내일 당장 회사를 나서게 된다면, 그 풍경은 남의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애석하게도 서울 자가 대기업 김부장의 시대는 끝났다.송희구 작가의 소설과 드라마가 대히트를 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가 직시해야할 현실이고 곧 다가올 이 시대 김부장들의 미래다. 사람도 모자라 AI라는 놈까지 합세하여 퇴직 시계를 앞당기고, 종국에는 살아남기 위해 너도나도 1인 기업이 되어야하는 세상이 도래했다.


이것은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기도 하다.


미국의 작가 닐 도널드 월시는 말한다. “Life begins at the end of your comfort zone.” 진짜 인생은 안전지대의 끝에서 시작된다고 말이다.


갑작스런 순서에 당황하지 않고, 나의 품격을 지키면서 회사 밖 인생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컴포트 존을 벗어나는게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대기업 명함이라는 달콤한 무게에 가려진 진짜 나의 인생을 찾고 싶다면, 이제는 대한민국 김부장들이 조금은 불편해져야 할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