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아이는 커서 가해자 아빠가 된다
*6년째 우울증을 돌봐오고 있고 어쩌다 전재산도 날렸지만 열심히 살아보려 노력하는 저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처방해 주신 약을 집에 와서 먹자 약의 효과라고 할까? 약의 도움은 생각보다 뛰어났다. 보통의 신경정신과약은 환자에게 처음부터 맞춤하게 들어맞는 경우가 많은지는 모르겠는데 (안 맞는 경우도 있음) 나 같은 경우는 다행히 처음부터 약이 잘 맞았던 것 같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다. 속이 몹시도 울렁거린다. 밥을 먹던 먹지 않던 상관없이 그랬다. 2주 후면 나아질 거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은 딱히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약을 복용하는 내내 속은 좋지 않았다.
내가 왜 이렇게 되고 정신건강 약까지 먹게 되었는지를 원인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의 아빠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지금 아빠는 엄마에게 잡혀 산다. 지은 죄가 많으시니) 사실 아빠는 너무 무서운 존재라 엄마 뒤에 가려진 검은 그늘 같은 거였는데,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은 이렇게 조금씩 꺼내어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날도 오는구나.
아빠는 제법 손재주와 기술이 뛰어나 손맛도 좋았다. 식당은 금세 자리를 잡고 갑자기 어려워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잘 넘어갔던 것 같다. 그리고 경영은 엄마가 했다. 엄마는 똑 부러지는 성격으로(종교에서만큼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다 흠) 모든 금전적인 관리를 했다.
부부가 같은 일을 하게 되면 정말 많이 싸우게 된다. 이삼일에 한 번씩은 동네가 떠나가라 싸웠기에 나는 지금도 큰소리가 나면 지레 겁부터 먹는다. 그래서 지금은 집에 있는 TV소리도 작게 튼다. 한 달에 한두 번은 아빠가 엄마를 잡는 날이다. 엄마도 사람이거늘.. 마치 큰 죄라도 지은 동물처엄 엄마를 던지고 발과 손으로 마구 폭력을 행사했다. 어떤 날은 엄마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경찰아저씨들은 우리 집에 무슨 도장 찍듯이 이따금씩 오셨다. 옆집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껴 신고하기도 했고, 어느새 돌아보면 경찰아저씨 두 분이 와 계시기도 했다.
그리고 명절에는 어김없이 언니와 동생에게로 폭력이 돌아갔다 (평소에도 이따금씩 그러긴 했지만) 아빠는 사소한 걸로 크게 혼을 내었고, 나와는 달리 고집과 주관이 또렷했던 언니와 동생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자 매타작을 넘어서 엄마에게 했던 것과 같이 흠씬 두들겨 팼다 (지금 시대였으면 철컹철컹 바로 가는 건데) 매번 같은 레퍼토리라 명절이 끔찍이도 싫었다. 가족 중 가장 마르고 몸집이 작았던 나는 아빠를 매번 말려보지만 당시 아빠의 근육은 식당 주방에서 실전으로 키워진 근육들이었기에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나는 구석으로 나가떨어지고 아빠는 폭력을 이어나갔다. 나의 기억력은 늘 붕어 수준인데 그때의 기억만큼은 (반복학습이 되어선지) 아직도 생생하고 선하다.
우리 집은 아빠 빼고 다 여자다. 그래서 나는 남자의 상을 아빠를 보며 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자라날수록 남자가 꺼려졌다. 특히 아빠 또래의 어른 남자를 보면 쌍심지를 켜고 흠을 찾기에 바빴던 것 같다. 그리고 권위적인 위치에 있을 때 그런 나의 눈빛은 더욱더 빛났다. 왜곡된 나의 남자상에 대한 정착이 왜곡인 줄도 모르고 두려움에 그만 30여 년을 넘게 온갖 가시를 꺼내어 보이며 힘을 빼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대학도 여대에 가게 되어 내심 안심이었다. 교수님은 보통 남자분들이셨지만 나에게 강압적인 오더를 내리는 존재는 아니었고, 그리 대학생활도 열심히 하지 않아서 큰 관심이 없었던 것도 있었다. 일을 할 때에도 디자이너분들이 대부분 여자라 부담이 없었다. 다른 부서의 남자분들과 소통을 해야하는 경우가 아예없었던건 아니지만 그건 잠시라 괜찮았다. 공간분리가 확실하게 되어 있기도 했고 대부분의 소통은 팀장님 위주였으니까.
그렇게 사회에 나와 남자상사를 보면 불편한 기색을 내딴엔 숨기긴 했지만 , 당시의 나의 사진 속 인상을 보면 특유의 그 매서움과 모난 성격이 고스란히 보인다. 모든 것이 불만이고 불행이라고만 생각했던 시절이다.
이건 아빠를 감싸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사실을 말하는 거다. 나는 아직도 아빠에게 진정 어린 사과를 받고 싶다.
아빠라는 사람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아빠의 아빠) 할머니는 새 시집을 가셨단다. 그곳에서 새로운 여자 아이가 태어나는데 그게 바로 고모다. 아빠는 씨가 달라서(새아빠가 낳은 자식이 아니니) 새아빠에게 종종 흠씬 두들겨 맞았다고 한다(아동폭력) 폭력성에 노출된 피해자 아이가 커서 폭력성을 행사하는 가해자로 성장한다는 건 100% 팩트였다.
재밌는 점은 현재 우리 집은 고모네랑도 잘 지내고 있다는 점이다. 고모가 아빠와 배다른 형제인 줄은 상상도 못 했었는데. 헐
속으로 수천번도 더 아빠를 향해 외쳤던 이 말은 비겁하게도 살면서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외려 아빠가 좋다는 거짓말을 가끔 하곤 했다. 그래야 언니나 동생처럼 안 맞을 것 같았거든.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엄마는 그때마다 씁쓸해했다 (미안 엄마, 집이 전쟁터라 나도 살려고 그랬어) 그는 나에게 있어 공포이자 질겁의 대상이었다. 피하고 싶고 무섭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더 한이 된다.
이후로
나는 나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게 되었다.
사실
우울증 약은 잠시 나의 다운된 기분을 올려주는 중요하고 고마운 존재였지만, 치료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는 요소는 아니었다. 거기에 무기력하게 일상을 보내다 보면 약을 빼먹기도 쉽다(우울증이라는 걸 알리고 싶지도 않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약을 먹고 싶지 않기도 했고) 특히 결혼준비로 다이어트와 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었던 당시 든든하게 먹질 못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우울증에 하나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어 당황스럽게도 결혼을 하고 일을 그만 둔뒤로 일상의 무기력함과 답답함은 더 심해져만 갔다 (이래서 여에스더 선생님은 우울증이라도 일을 그만두지 말라 하셨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