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요리를 정말 잘 하신다. 못하는 요리가 없으니, 천부적 재능을 타고 났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초등학생 때, 일기에다가 '우리 엄마는 오늘도 도넛을 100개를 튀겼다. 어제는 200개를 튀겼다' 적었다가 담임선생님이 '엄마가 뭐하시는 분이니?' 라고도 물어봤거든. 그걸 또 고스란히 집에 와 엄마에게 전했고, 엄마는 깔깔 댔다. 그리고 그 얘기는 지금도 안주거리처럼 튀어나온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가정주부지만, 타고난 손재주로 인해 주위에서 가만히 두지 않는 인싸 중에 인싸랄까. 90년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살 때, 미술 전공이었던 엄마는 집에서 친한 지인들, 학부모들을 초대해 미술을 가르쳤다. '쉐도우박스(shadow box)'라고 똑같은 회화작품을 여러 장 입체감 있게 자르고 붙여 액자로 만드는 작업이다. 몇 시간 앉아서 미술을 하고 있으면 배가 고픈 법. 그래서 엄마는 간식타임으로 직접 만든 쿠키와 빵, 케익을 그들에게 대접하곤 했다. 그러자 점점 미술은 뒷전이고, 베이킹에 더 큰 관심을 보인 분들이 빵을 가르쳐달라고 하셨단다. 엄마는 이렇게 90년도, 당신이 30대였을 때부터 집에서 베이킹과 요리를 가르치게 됐다. 그 시작은 타지에서 였다.
우리집은 사랑방 같은 공간이었다. 한국으로 이사왔을 때도 마찬가지. 잠시도 가만 있는 나태함이라곤 모르는 엄마는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바쁜 가정주부가 아닐까 싶을 만큼. 집에는 늘 사람들이 오고 갔으며, 맛있는 음식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복 받은 환경에서 자랐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내 6살 어린 남동생이 고등학생이던 시절. 남동생은 이제 엄마도 가족에게 헌신하는 일에서 벗어나 엄마가 좋아하는 일, 엄마가 잘 하는 일을 하셨으면 좋겠다는 소신발언을 했다. 한창 공부에 집중해야 하는 고등학생이었지만, 자기 공부는 자기가 알아서 잘 하는 모범적인 동생이니 가능했다. 엄마는 남동생이 고3을 앞두고 있는 중요한 시기에, 본격적으로 외부활동을 시작하셨다. 당신이 가장 자신있고 잘 하는 음식 쪽으로.
엄마는 중년의 나이에 외부활동을 시작했고 화려한 이력을 차근차근 쌓아갔다. 본래부터 워낙 기본이 탄탄하다 보니, 수월하고 빠른 속도로 도장깨듯 경력을 쌓아갔다. 물 만난 고기처럼 물꼬가 한번 트이자 겉잡을 수 없었다. 대회에 나가 수상을 하고, 심사위원을 하고, 학생들에게 요리를 가르치고, 해외 출장 강연을 다니고, 기관의 부원장을 거쳐 원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 모든 일은 엄마의 눈부신 50대에 있던 일이다.
그리고 엄마는 가족들의 적극적인 내조에 힘입어, 작은 작업실을 하나 차리게 됐다. 2019년 내 나이 30살. 엄마의 58세. 혼자 조용히 음식연구를 하고, 실험조리도 하고, 주위 지인들을 초대해 사랑방 같은 공간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려가고자 했다. 가끔 수업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 '가끔'이 처음 의도와는 달리, '본격적'으로 바뀌면서 엄마 혼자서는 버거운 일이 됐다. 감사하게도 빠른 시일 내에 자리를 잡은 터. 쿠킹스튜디오로서 원활한 운영을 위해 내가 뛰어들게 됐다. 당시 대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던 나는 가을학기를 앞두고 퇴사를 했다.
그렇게 나는 엄마와 함께 쿠킹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2022년, 횟수로 어엿한 4년차. 결론은 엄마가 뭐하시는 분이냐 묻는다면 엄마는 요리연구가요, 딸은 그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