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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집사 Jul 22. 2022

이탈리안 변호사의 리몬첼로

나 팁 받아본 여자야

떡 수업하는 날이었다. 친구와 함께 수업을 신청하신 수강생님을 기다리는데, 뒤이어 문을 열고 들어오는 훤칠한 중년의 외국 남자분이라니! 떡에 관심 많다는 '그 친구'가 외국인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보통 우리 요리수업에 외국인 수강생이 오실 경우, 미리 영문 레시피도 준비하고, 외국인 눈높이와 이해력에 어렵지 않도록 식재료나 양념, 전반적인 수업 준비를 좀 더 세심챙기는 편이라 간단한 상담을 먼저 받곤 한다. 즉, 우리 기준에서 그 날은 외국인 수강생을 맞이할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였던 셈. 그럼에도 중후한 영화배우처럼 출중한 외모, 조금 희끗하지만 그게 더욱 멋스러웠던 헤어스타일, 점잖은 매너의 이 분은 "Hello, Ladies!" 사람 좋은 미소를 띄우며 스튜디오에 들어오셨다.


한국에 7년 넘게 거주 중인 이탈리안이었고, 직업은 국제변호사. 한국인 여자친구가 수강신청을 도맡아 두 분이 함께 수업에 오셨다. 서둘러 웰컴티와 입가심할 다과를 내어드렸다. 간단한 우리 소개를 영어로 전한 뒤, 영문 레시피를 미처 준비 못했다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변호사님은 전혀 개의치 않으며, 도리어 미리 말씀 못 드려 죄송하다 했다. 본인은 한국에 오래 머물면서 한국 음식도 가리는 것 없이 잘 먹고, 한국 문화를 좋아하는데 특히 전통 한식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그러던 와중, 마침 한국인 여자친구가 소개해준 우리의 떡 수업에 관심이 생겼고, 떡 만드는 과정을 제대로 알고 싶어서 같이 오게 됐다고 정중히 말씀하셨다.


그날 메뉴는 쑥설기와 호박말이찰떡. 우리 떡 수업의 특징이 있다면, 담백한 설기떡과 쫀득한 찰떡을 1개씩 다룬다는 점이다. 치아에 쩍쩍 달라붙는 찰떡은 외국인들이 그닥 선호하지 않는단 인식이 흔히 있는데, 변호사님은 떡 자체를 무척 좋아하셨다. 그래서 간단한 레시피 설명을 할 때부터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얼른 쌀가루를 만져보고 싶다며 기대감이 가득했다. 크고 푸른 눈엔 장난기 또한 그득했다.


사진 출처: 본인 제공


떡은 쌀가루를 체에 밭쳐 골고루 내려주는 첫 단계를 거친다. 가장 기본이면서, 가장 많은 힘을 필요로 다. 변호사님은 자기가 남자라 확실히 힘이 좋다며, 상대적으로 느린 여자친구를 장난스레 놀리며 빠른 속도로 쌀가루를 내렸다. 사방팔방 쌀가루가 튀는 현장에서도 '단호박가루 색깔이 너무 곱다', '쑥가루는 신비롭다', '향이 너무 좋다' 감탄을 금치 못했다. 평생 쿠킹클래스처음 해 본다, 우리 음식에 대한 이해도 빠르고, 떡 만드는 과정아주 순조롭게 이해하셨다. 고향인 이탈리아에서는 주방에서 어머니가 늘 요리를 하시고, 식구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누는 것에 익숙하다며 이는 한국도 비슷하지 않냐며 질문도 아끼지 않았다. 남다른 손놀림과 속도에 감탄을 하자, "우리 이탈리안은 누구보다 음식에 진심입니다." 본인은 요리 배우는 것을 늘 좋아하고, 평소 집에서 요리도 곧잘 다며 지금 이 순간 무척 즐겁다고 하셨다.


김 오른 찜기에 쌀가루를 안치면 20분 뒤 떡은 완성된다. 포슬포슬 따뜻하게 쪄진 수강생님들의 떡은 간단히 시식을 한 뒤, 포장용기에 담아 댁으로 가져가실 수 있게 정리한다. 그 동안 본인이 한국에 살면서 먹어본 떡 중 최고로 맛있다며 엄지를 척. '환상적이다', '떡이 너무 아름답다', '최고의 가르침이다' 작은 표현도 아끼지 않는 이탈리안 특유의 덕담은 뽀나스. 외국인이라서 단순한 체험에 그치거나 수업내용을 간소화하지 않고, 한국인 대상우리 일반 수업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우직하게 대한 스타일이 인상 깊으셨던 모양이다.


사진 출처: 본인 제공


저녁수업이라 밤 10시에 끝났다. 늦은 시간까지 수고 많으셨다며 두 분을 배웅하고 돌아서는데, 잠시 후 초인종이 띵동. 소지품이라도 두고 가셨나 싶어 서둘러 문을 다시 열어보니, 변호사님이 꾸깃해진 만원짜리 지폐 2장을 조심히 내밀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팁을 드리고 싶다면서. 아이고, 여기가 외국도 아니고. 너무 감사하지만 한국은 팁 문화가 없다며 한사코 사양했는데, 변호사님은 망부석처럼 현관 앞을 떠나지 않으셨다. 그의 뒤로 여자친구분은 웃으며 그 만큼 본인이 감사하다는 표현을 하시고 싶은 거니, 부담갖지 마시고 받아달라 하셨다. 세상에. 나 지금 팁 받은 거야? 그것도 한국에서 이탈리아 사람에게 팁을 받다니! 이런 뜻밖의 유쾌한 일도 다 있다.


그날 밤, 나는 변호사님께 받은 메일주소로 영문 레시피를 새로 정리해 보내드렸다. 그리고 그들은 한 달이 채 지나기 전에 다시 찾아오셨다. 이번엔 한국의 전통음료 수정과와 식혜, 그리고 고기만둣국을 배우기 위해서. 지난 첫 번째 만남에 비하면 한결 편안하고 익숙한 만남. 그리고 한 손에 무언가를 들고 오신 변호사님. 리몬첼로였다.


사진 출처: 본인 제공


그는 집에서 본인이 직접 만든 리몬첼로라며, 마시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Limoncello, 다소 높은 알코올 도수를 자랑하는 '보기보다 꽤 독한' 이탈리아의 레몬 칵테일 술이다. 보통 식사를 마치고 달콤한 디저트와 함께 식후주로 즐긴다. 우리가 막걸리를 마시듯, 이탈리아에서는 집집마다 리몬첼로를 담가 마시곤 하는데, 저마다 레시피도, 마시는 취향도 다양하다고. 게다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리몬첼로가 주는 의미는 각별해서 정말 소중한 사람 아니고선 쉽게 선물하지도 않는다 하셨다. 한국인 여자친구분께서는 아직 본인도 리몬첼로는 받아보지 못했다며, 작은 유리병에 담긴 이 레몬술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의미이고 감사의 표현인지 다시 한번 와닿게 됐다.


변호사님이 만들어주신 리몬첼로는 산뜻한 레몬 향이 매력적이면서, 듣던대로 진짜 독했다. 술을 잘 못 하는 내가 과실주마냥 꿀떡꿀떡 첫 입에 마시다가, 아주 골로 갈 뻔도. 강렬한 첫인상을 내게 안겨준 Limoncello from Italy. 그 이후 우리는 탄산주로 좀 더 희석해서 알코올을 옅게 낮춘 뒤 마시고 있다. 쿠킹스튜디오 오픈 후 초창기에 있었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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