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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집사 Sep 27. 2022

이 많은 나라들 중에 인도네시아라니!

추억을 선물해 준 외국인 수업

우리 가족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10년 이상 거주를 했었다. 내가 태어나서 1살 때, 그러니까 90년대 초, 아빠의 장기 발령으로 인해 온 가족이 이주를 했다. 엄마 아빠에게는 인생의 황금기 30대를 가장 화려하게 보낸 곳이라 자카르타는 우리 가족에게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어느 날, 엄마에게 걸려온 한 통의 상담전화.


"선생님, 외국인 친구들이 한국음식을 너무 배우고 싶어 하는데요. 여기가 제일 좋아 보여서 전화드렸어요. 외국인 수업도 하세요?"


외국인 대상으로 한식 쿠킹클래스를 종종 하는지라 수업 가능하다고, 실례가 안 된다면 어느 국적인지 여쭤봤다. "인도네시아예요."




인도네시아 그 다섯 글자는 언제 들어도 참 반갑다. 우리 가족이 2000년에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온 이후, 여태 인도네시아를 다시 방문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여행으로 다시 가봐야지 가봐야지, 하면서도 그게 참 어렵다. 한국으로 돌아와 바삐 살면서 인도네시아에 얽힌 모든 것들은 점점 희미하게 추억으로 남겨졌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학생 시절까지 전학과 이사를 많이 다녔다. 서울에서 다닌 초등학교, 중학교가 있고 분당에서 다닌 초등학교, 중학교도 있다. 초등학교는 서울에서, 중학교는 분당에서 졸업을 했다. 그 영향일까. 늘 예민했고, 조용하고 조금 내성적이었으며 어디서도 튀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지금과는 성격이 완전 딴판이었다.


3반에 오늘 전학생 왔다, 하는 날엔 교실 복도 쪽 창문에는 다른 반 학생들이 빈틈없이 다닥다닥 붙어서 동물원 원숭이처럼 구경을 해댔다. 전학생이 드문 케이스였나, 30대가 넘은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면 그렇게까지 신기할 일인가 싶지만 아무튼 그땐 그랬다.


거기에다가 '쟤 외국에서 왔다'는 말이라도 돌면 더 주목받을 것이 뻔하므로, 나는 담임 선생님에게도 말하지 말아달라며 부탁을 하는 등 조용한 학생이 되기로 했다. 당시 '외국에서 왔다' 하면 또래 친구들은 보통 '미국' 이라고만 생각하며, 그때만 해도 '인도네시아'는 '인도네시아? 인도 옆에 있나?' 라며 인지도가 아주 낮을 때였다. 또한 외국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한국으로 전학을 왔다고 소개하면, 흔히들 '우와 영어 잘하겠다. 영어로 말해봐' 하던 친구들도 많았기에, 주목받는 것을 극혐 하던 사춘기 시절의 나는 내 입을 다무는 방편을 선택했다. 그토록 감추고 싶던 나의 작은 비밀은 우습게도 결국 의지와는 상관없이 허무하게 밝혀졌지만.


중학생 때 자습시간. 학생들은 자율학습 중이고 담임 선생님은 교내 영어말하기대회에 나갈 자기 반 학생들 명단을 추리고 있었다. 나는 그때 반장이었나, 무슨 담당이었나, 아무튼 뭐 때문인지 교실 뒤쪽을 청소 중이었다. 영어말하기대회에 출전하는 학생들은 국내파, 해외파로 구분을 짓곤 했는데, 담임 선생님이 '누구도 나가고, 누구도 나가고...' 체크하다가 별안간 'ㅇㅇ는 해외파로 나갈 거지?' 큰 소리로 교실 뒤쪽에 빗자루질 중이던 나를 향해 물었고, 반 아이들의 시선도 일제히 나에게 와 꽂혔다. 'ㅇㅇ가 외국에서 왔어?!'


피곤하게 됐다. 쉬는 시간에 쪼르르 모여든 친구들에게 나는 '인도네시아는 인도 옆에 있는 게 아니고, 우리나라보다 한참 밑에 있으며 비행기로 7시간이 걸리는 곳이고, 일 년 내내 기후가 더운 나라이며 영어가 아닌 인니어라는 자기네 언어를 쓴다'는 둥 따위의 설명을 주절댔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퍽 순수한 그림인 것 같기도 하나, 내 얘기를 듣던 누군가는 대뜸 '인도네시아? 거기 못 사는 나란데?' 한 마디를 보탰고 나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별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인도네시아 분들이라면 더 좋네요. 제가 자카르타에서 10년 정도를 살다 왔었어요. 우리 실장님이 수업할 땐 영어로 통역 가능하고 레시피도 영문으로 드릴 거예요. 간단한 인니어 정도는 제가 직접 구사할 수 있구요."


반색하는 엄마의 말에, 그분은 놀라워하며 기뻐했다. 수강료와 가능한 일정 등 간단한 몇 가지 안내사항을 추가로 전해 듣고는, 친구들에게 이 내용을 전달하고 괜찮다고 하면 우리에게 다이렉트로 연결을 시켜드리겠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 있다, 엄마는 즐거워했다. 나도 신기했다. 외국인 쿠킹클래스를 진행하면서 그동안 미국인, 이탈리아인, 일본인, 대만인 등등은 만나뵀지만 '제2의 고향' 사람들이 찾아올 줄은 생각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다이렉트로 연결이 닿았다. 무려 카톡을 보내왔다. 알고 보니, 이 분들은 한국에 거주 중인 주한인도네시아대사관 관계자의 와이프들이었다. 연말이면 모두 고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 한국을 떠나기 전에 한국음식을 제대로 배워보고자 열의에 가득 차 있었다. 간단한 한국어는 알아들으며 케이팝을 비롯해 한국문화와 한식을 워낙 좋아하고 관심이 많으셨기에, 지체 없이 수업을 예약 확정 지었다.


약속한 수업 날 당일, 나는 직접 건물 밖에까지 마중을 나갔다. 고급 세단에서 우아하게 내린 이들은 무슬림 종교를 상징하는 히잡을 쓰고 있었고, 너무나 밝은 얼굴로 정답게 인사를 건넸다. 이것저것 조율할 내용들이 많아 수업 전날까지도 자주 카톡을 나누었기에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낯설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우리 스튜디오로 처음 들어올 때, 두근거리는 이들을 향해 "아빠 까바르? 슬라맛 빠기!(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환히 웃으며 인니어로 인사를 건넨 엄마. 재미있게도 이들은 "안녕하세요!" 한국어로 동시에 인사를 건넸다.


어머! 한국에서, 그것도 강남의 작은 스튜디오에 요리수업을 왔다가 이렇게 인니어를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며 너무나 감격스러워하던 분들. 수업은 뒷전이고 어쩜 이런 만남이 다 있냐며, 크게 좋아하는지라 만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수업 만족도는 벌써 200%를 넘어가고 있었다.


90년도에 우리 가족이 자카르타에서 살았던 동네, 유명한 쇼핑몰과 백화점, 관광지 등의 이름들이 스쳐 오가며 지금은 더 크고, 더 좋아졌다는  정말 오랜 고향 사람들을 대하듯 반가운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사진 출처: 본인 제공


이때 이 분들은 총 4일 연속으로 수업을 예약하셨는데, 첫 번째 수업 날은 두 명, 두 번째 수업 날은 세 명. 점점 인원수를 늘리더니 마지막 수업 날은 네 명으로 자체적으로 전원 만석을 채우셨다. 알고 보니, 수업을 대표로 신청하면서 나와 카톡을 주고받던 분은 인싸 중에 인싸. 주위에 본인처럼 한국문화와 한식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워낙 많아서, 요리수업 후 자신의 인스타그램사진과 좋은 후기들을 잔뜩 올린 뒤 관심 보이는 다른 친구들에게 적극 소개하며 요리수업에 함께 하고자 하셨다.


사진 출처: 본인 제공


이들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엄마와 나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긴 하나, 짐작한 것보다도 더 대단한 높은 위치의 분들이셨으며 이들이 수업 후기를 남길 때마다 우리 인스타그램 계정에도 인도네시아 분들의 팔로우가 매일같이 늘어났다.


사진 출처: 본인 제공


4일 연속 수업을 오면서 이들은 멸치볶음 같은 한식의 대표 밑반찬부터 끝판왕 갈비찜까지 골고루 모두 배우셨다. 종교상의 이유로 돼지고기와 술을 먹지 않는 이들을 위해 몇 가지 메뉴는 레시피를 변형했다. 이를 테면, 소시지와 햄이 들어가는 부대찌개에는 템페와 닭고기 소시지를 넣었고, 짜장면에도 역시 돼지고기가 아닌 닭고기를 넣어서 조리했다.


템페는 우리나라의 청국장 메주처럼 인도네시아의 대표 콩 발효식품으로, 요즘은 한국에서도 비건 요리에 많이 사용하는 식재료로 유명하다.


사진 출처: 본인 제공


또한 고기의 잡내를 날리기 위해 사용하는 청주는 과감히 생략하고 다른 양념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이러한 배려에 인도네시아분들은 무척이나 고마워하고 감동했으며, 마지막 수업 날엔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며 귀한 수제 템페를 선물로 전해주시기까지 했다.


이때 수업 이후에도, 한국을 떠나기 전 다시 개별 연락을 통해 1:1 요리수업을 몇 차례 추가로 진행하기도 했으며, 지금까지도 우린 인스타그램을 통해 서로의 근황을 보며 연락을 주고받는 좋은 친구가 됐다.




"인도네시아? 거기 못 사는 나란데?" 얄밉게 톡 쏘던 누군가의 그 한 마디에 얼버무렸던 중학생 시절의 나로 다시 돌아가 이를 바로잡을 수 있다면,


인도네시아는 지진도 많이 일어나고, 데모도 잦은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인 건 맞아. 지진이 올 때면 아파트 주민들이 모두 지상으로 나와 좌우로 흔들리는 아파트를 조마조마하게 바라보기도 했어. 샤워하다 뛰쳐나와 샤워가운을 입은 채 머리가 젖어있던 외국인 아저씨는 이상하게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 고층 아파트에 사는데도 나라에 거친 시위가 있을 때면 엄마는 베란다 커튼을 치고 거실 등을 끈 채 집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쥐죽은 듯 숨어있어야 한다고 했어. 시위하는 사람들이 집에 사람이 있는 것 같으면 돌을 던져서 창을 깨는 소동을 벌였거든.


그래도 내가 만나본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대체로 착하고 순수하고, 이방인에게 친절해. 입맛에 잘 맞는 맛있는 음식들이 많고, 꿀 같이 달콤한 과일들이 지천에 널려있어. '과일의 여왕'이라는 두리안은 우리 엄마가 제일 좋아해. 아쉽게도 냄새가 역해서 나는 두리안 근처에도 못 가지만. 물가는 훨씬 저렴한데 그 당시의 우리나라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화려하고 큰 쇼핑몰과 백화점, 아파트, 고층 호텔들이 시내에 즐비해.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보통 집에 기사와 식모가 있고 방마다 에어컨을 빵빵하게 켜고 있기에 일 년 열두 달 더운 나라임에도 더운 줄 모르고 살아. 어느 크리스마스날 저녁엔 티비에서 마이클잭슨이 heal the world 노래를 불렀어. 내가 다니던 국제학교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모두 모인 아주 큰 학교인데 운동장은 초록 초록한 잔디밭에 수영장, 헬스장까지 모두 갖춰진 최신식 시설을 자랑해. 아 참, 거긴 학원이 없어. 모두 집에서 레슨을 받아. 나는 바이올린과 수영 레슨을 오래 받았어. 바이올린은 악보만 볼 줄 알고 영 젬뱅이지만 수영은 잘 해. 내가 살던 아파트에는 궁전 같은 로비, 헬스장, 수영장, 골프장, 잔디밭 놀이터가 있었고 친구네 아파트에는 중독성있는 묘한 냄새가 나는 나무로 지어진 더운 방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습식 사우나실이었어. 




조금은 구차하고 유치하지만,


응. 마냥 빈곤하기만 한 나라는 아니야. 조용하고 내성적이던 당시 중학생의 나는 아무래도 그 한 마디에 여간 꽁했던 게 아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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