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돈이 있어야 나가지
일어나 보니 집에 혼자였다. 엄마가 좋아하는 모임은 아침부터 만나서 열심히 수다를 떨어야 하는 스케줄을 따르기 때문에 일찍부터 나가신 모양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매번 아침부터 하는 건지 생각해보면 웃기고 귀엽다. 가만히 누워있다가 아침 겸 점심부터 먹을까 해서 두유에 그래놀라를 와르르 넣고 식빵으로는 피자빵을 해 먹었다. 식빵을 일단 살짝 굽고 그 위에 토마토소스와 체다치즈를 올린 다음에 반으로 접어서 와플 기계에 꾸욱 눌러먹으면 정말 맛있다. 오랜만에 여유롭게 맞이한 첫 끼니였다. 요즘엔 너무 늦게 일어나는 탓인지 나를 기다리다 못한 집주인들이 밥 먹으라는 외침으로 나를 깨우기 때문이다. 그럼 난 허겁지겁 일어나서 안경도 쓰지 않고 첫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 아무래도 할 일을 일부러 만들어야 하는 오전에는 일어나기가 힘들다.
그래서 내일부터는 무조건 눈을 뜨면 샤워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8년 동안 나와 살아보니 대충 패턴을 알 것 같다. 밖에 나갈 스케줄이 있든 없든 샤워는 해야 생산적인 삶이 가능하다. 밥 먹여주는 건 당연히 필요하고. 오전에 운동을 하겠다는 호기로운 계획은 생각도 하지 말아야지 싶다. 정말 바쁜 날인데 운동이 너무너무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어제는 문득 엄마가 '너는 당분간 나가서 살 생각이 없니?' 하고 물어보셨다. 무슨 뜻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단순히 독립할 생각이 있음을 묻는 것인지, 결혼 의사까지 물어보는 것인지. 일단 전자는, 돈이 있어야 나에게 선택권이 주어지는 것 아닌가 싶다. 이미 자취를 해봐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삶을 유지함에 얼마나 꾸준히 돈이 드는지. 전기세, 수도세를 내고 장을 보고 하물며 물을 마시고 화장지를 쓰는 데에도 소비를 감행해야 한다. 28살이 되었는데 생활비를 받아가며 살고 싶지는 않으니 고정적인 수입이 생길 때까지는 사치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오늘처럼 혼자 있는 시간이 어느 정도 보장되어있다는 점에서 아직까지는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후자는, 아직 내가 원하는 제도가 마련되어있지 않다고 생각되어서 생각이 없다. 적어도 동반자법이 제정되지 않는 이상은. 부모님 세대에서 받아들여질 개념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아버지는 언젠가 산책하면서 말하길 본인은 사랑하는 사람이(그러니까 내 어머니) 나타나지 않았다면 굳이 결혼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하셨으니. 어쩌면 강경 결혼파는 아니신 듯 하다. 그냥 자만추이신 걸까.
적어도 5월까지는 구직 시장에 뛰어들지 않을 예정이다. 이제 곧 다가오는 3월은 구직에 필요한 공부를 하고 어학 공부를 하면서 운동을 하고 싶다. 발목도 덜 나아서 재활에 집중해야 할 것 같고. 솔직히 2월까지는 수련을 하느냐 마느냐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전문의 보드를 따는 것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당장 미래에 대한 큰 고민 없이 돈을 버는 것도 충분히 좋은 옵션이었다. 하지만 일단 gap year를 갖고 싶어졌다. 긴가민가 한 상태에서 인턴 생활을 하기에는 내 성향이 그렇게까지 무던하지는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확고하게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면 모를까.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면서 여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헛되이 보내지 않게 글로 기록하면서 모니터링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