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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하다 Dec 04. 2022

아빠 산호

바닷속에서 그리운 이를 만난다.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이별한 후 시작된 관계가 있다. 참 많은 이야기를 들어 내적 친밀감이 가득한데,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이름이 있다.




지난했던 코로나 19의 세월이 잠식해간 다이버의 삶은 보홀에서 다시 깨어났다. 너무 오랫동안 바다를 떠나 있는 시간에 익숙해져 버린 걸까. 두 달 전, 해외로 가는 길이 그저 즐겁지만은 않았다. 집에 두고 온 반려견도, 키핑장에 다육이들도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도착한 첫날 저녁 식사를 하러 간 레스토랑에서 눈물이 고여

'너와 함께 보홀에 오다니 참 좋다'

라고 말하는 남편을 보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필리핀 보홀은 남편이 결혼 전에 몇 년간 살며 다이빙 강사 생활을 했던 곳이다. 벌써 떠나온 지 5년은 된 것 같은데, 그곳에는 남편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남아있었다. 단골 식당의 지배인이 그를 반가워하며 내게도 인사를 건넸다. 그가 살던 집과 동네를 보았다. 세 번째 오는 바다인데도 남편이 보여주는 보홀 바다는 느낌이 달랐다. 가족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고향에 온 것 같은 뭉클한 기분이었다.


보홀은 내가 아마추어 시절, 처음으로 강사 없이 나보다 실력이 부족한 동생 다이버를 데리고 단둘이 왔던 여행지라 내게도 추억이 많은 곳이다. 처음으로 수중 카메라를 들기 시작했고, 다른 지역으로 이어지긴 했지만, 전체 일정이 가장 길고 다이빙 횟수도 많았던 여행이었다. 8년 전이었는데도 그때의 바다가 기억 속에 살아 있다.


남편과 필리핀에서 다이빙을 할 때 편한 점은 조류를 거스를 일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달과 태양의 인력, 그리고 지구 자전에 의해 바닷물은 주기적으로 상승과 하강을 하는 조석 현상이 발생하는데 이 물 높이의 차이로 생기는 바닷물의 흐름이 조류다.


"조류는 거스르는 게 아니야."


남편이 종종 하는 이야기다. 조류의 세기는 조석 현상의 주기, 태양과 달, 지구의 위치가 이루는 각도, 그 외에 지형과 바람 등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달라진다. 바닷속에서는 러닝머신에서 가볍게 걷는 정도의 체력을 들여 반대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가능한 조류도 있지만, 바로 러닝머신 밖으로 나를 내동댕이 쳐버릴 만큼 강력한 힘의 조류를 만날 수도 있다.


만약 가고 싶은 포인트가 있는데 우리가 입수하려는 지점에서 조류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있다면

배를 돌려 조류의 흐름과 같은 방향으로 입수해서 편하게 조류를 따라 다이빙하면 된다는 것이 남편의 생각이다.


조류의 흐름을 그때그때 읽을 줄 아는 인솔자와 다이빙 샵, 정확히는 배를 컨트롤할 수 있는 지위를 가진 사람과 함께 하면 그만큼 편하게 다이빙할 수 있고, 필리핀 몇몇 지역에서는 남편의 경험과 인맥을 통해 그것이 가능하다.


거기에 나와 다른 남편의 성향이 더해져서 나의 다이빙 라이프는 만족도가 아주 높아졌다. 나는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눈이 부족하고, 준비되지 않은 갑작스러운 상황을 마주하는 것이 두렵다. 그렇지만 남편은 큰 그림을 그리고, 임기응변에 능한 사람이라서 든든하다. 일상생활에서도 발휘되는 그의 장점은 바닷속에서는 유독 더 빛을 발한다. 그래서 그와의 다이빙은 편안하고, 신뢰할 수 있고, 즐겁다.


보홀에는 '발리카삭(Balicasag)'이라는 다이빙 포인트로 유명한 섬이 있다. 세계 10대 다이빙 포인트 리스트에 종종 언급되는 곳으로 아름다운 환경과 풍부한 어종, 따뜻한 수온으로 초보자들도 즐기기 좋은 바다다. 오랜만에 가는 발리카삭은 어떤 모습일까 설렘과 기대를 안고 입수했다.


발리카삭 '생츄어리(Sanctuary)라는 포인트에서 제법 속도가 있는 조류가 흐르고 있었고, 우리는 조류의 방향대로 몸을 맡긴 채 흐르고 있었다. 공항에서 무빙워크를 타고 가만히 서서 진행방향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 내 다리를 움직여 핀을 차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몸이 조류의 힘으로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주 큰 부채산호를 마주했는데, 먼저 도착한 남편이 카메라로 부채산호를 촬영 중이었다. 부채산호는 언제 봐도 좋아서 나도 늘 그냥 지나치지 않고 촬영을 하는 대상이지만, 조류와 함께 몸이 흘러가는 중이라 녹화버튼을 누른 채 지나가며 화면에 산호를 담았다. 그런데 남편이 주변 바위를 붙잡고 조류에 맞서며 산호를 촬영하고 있었다. 산호가 워낙 크고 멋지긴 했지만, 조류를 거스르지 않는다는 남편의 평소 모습과는 조금 달라서 혹시 산호에 내가 보지 못한 뭔가 귀한 생명이 붙어 있는 걸까? 싶어 조류를 거슬러 핀을 차서 조금 지나친 남편과 산호 쪽으로 돌아갔다.


발리카삭 생츄어리 포인트의 부채산호와 촬영중인 남편, 2022


그가 뭔가 나에게 말을 한다. 풀페이스 마스크는 얼굴 전체가 덮여 있어 송수신기를 설치하면 서로 대화가 가능하다. 우리는 바다에서 서로 꽁냥 거리는 대화를 하며 다이빙을 해왔는데, 이번 투어 전에 송수신기에 문제가 생겨 수중에서 말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조류를 거스르는 건 아마 그보다 내가 더 싫어할 거다. 아니 싫다기보다는 힘들다. 큰 카메라를 들고 있었던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조류와 맞서 부채산호를 보기엔 힘이 부쳤고, 그대로 다시 조류에 흘러가며 여전히 부채산호와 함께 있는 그의 뒷모습을 촬영했다.


숙소에 와서 오늘 찍은 영상들을 살펴보다가 남편 카메라 메모리에 담긴 그의 음성에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아빠, 잘 있었어? 난 잘 지내요. 보고 싶어요."


2014년 보홀에서 강사생활을 하던 남편은 아버님의 부고를 해외에서 접하게 되었고, 한국까지 가는 길은 참으로 멀고도 멀었다. 소식을 들은 시각이 깊은 밤이었고, 지금처럼 보홀 - 인천 직항 비행기도 없어서, 아침까지 기다려 배를 타고 간 세부에서도 한국으로 가는 밤 비행기를 탈 때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사고였기에 가족들이 겪었을 충격과 고통은 감히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프다. 남편은 제정신을 가다듬을 여력이 없을 때 보홀에 돌아오게 되었고, 첫 번째 다이빙에서 아버지를 기억하는 장소를 바닷속 어딘가로 정할 생각을 했다고 한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또 수만 가지 생각이 났겠지. 그렇게 넋이 나간채로 다이빙을 하다가 그 큰 부채 산호를 보지 못하고 충돌했다고 한다. 다이빙을 마치고 올라왔는데 어떤 어르신이 '이강사가 부채 산호에 포대기처럼 감싸져 안겨 있어서 뭐 보여주려고 하는 줄 알았다'라고 하셨단다. 마음이 찡해지면서 그때부터 그 산호는 '아빠 산호'가 되었다.


영상 속에서 그는 내 탱크를 잡고 돌려세우며 "이게 아빠 산호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왜 입수 전에 말해주지 않았냐고 했더니, 너무 오랜만에 온 거라 혹시나 산호가 망가져있거나 없어졌으면 내가 상심할까 봐 걱정되어서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     

내 탱크를 돌려세우고 있는 남편. 360도 카메라에 아빠 산호와 함께 찍혔다.


아버님은 내 눈물 버튼이다. 올해 기일에는 정작 가족들이 다 웃으며 인사를 드리는데 혼자 주책맞게 눈물이 나서 스스로 진상이라고 생각하며 닦았다. 한 번도 뵙지 못한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은 긴 장례를 치르면서도 울 수 없었던 남편을 향한 애잔함이 더해져 늘 파도처럼 출렁인다. 2020년, 남편과 예능 프로그램을 촬영할 때 어머님 댁에서 아버님께서 군대에서 보내셨던 편지를 읽고, 앨범을 보며 한참 웃었는데, 남편은 아빠가 떠난 지 6년이 지난 오늘 처음으로 아빠 이야기를 하며 엄마와 웃었다고 고맙다고 했다.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고 슬퍼하는 감정을 참거나 억누르지 않고 표현하는 것이 건강한 애도라고 했다. 나를 만나 처음으로 울어봤다는 남편이 너무 오랜 시간 슬픔을 참아왔다는 생각에 늘 마음이 시리다. 아버님 모신 곳에 가면 난 좀 더 오래 있고 싶은데, 한마디 말도 없이 잠시 있다가 그만 가자고 말하는 무뚝뚝한 아들을 보면서, 평소에 나와의 대화 속에서는 그렇게도 그리워하는 아빤데, 아직도 감정을 누르고 있는 걸까? 생각했었는데. 남편은 바닷속 아빠 산호에게는 아이처럼 말하고 있었다. 바다는... 그런 곳이구나. 네모난 비석으로 남은 아빠보다 그의 몸 몇 배로 커다랗게 살아 숨 쉬는 아빠 산호가 그에겐 더 대화하고 싶은 대상이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자 또 뭉클해졌다.


한국에 돌아와 유튜브에 올릴 영상을 만들다가 문득,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제발, 제발, 맞았으면 좋겠다. 나는 8년 전 내가 처음 수중 카메라를 들었을 때의 기록을 찾는다.


'나 그때 아빠 산호를 만났었던 것 같아.'


나는 사진을 찾아냈고 떨리는 마음으로 사진을 비교하다가 내가 촬영한 그 산호가 아빠 산호가 맞다는 것을 확인하고 정말 기뻤다. 산호는 동물이긴 하지만, 한 곳에서 쭉 자라나는 모습이라 식물과 닮았다. 다육이를 키우게 된 이후에 나는 종종 촬영 날짜 경과를 적어 before & after 사진이나 영상 비교를 하는데, 8년 사이 자란 아빠 산호를 바라보는 내 마음이 그래서 더 벅차올랐다.


2014년의 아빠 산호(좌) / 2022년의 아빠 산호(우)


내가 8년 전 촬영한 건 2014년 5월. 남편이 이 산호를 아빠 산호로 정하게 된 건 11월 이후다. 내가 처음 촬영했던 부채산호가 내 미래의 남편이 아빠라고 부르는 산호가 되었다니. 부부는 컴퓨터 화면 앞에 머리를 맞대고 아빠 산호의 8년 전과 오늘을 비교하며 신기해했다.


나를 만나기 전, 어디에도 꺼내놓지 못했다던 남편의 마음을 안아주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준 바다가 고맙다.


보고 싶은 아빠. 잘 지내시나요? 저희는 잘 지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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