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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Jun 17. 2024

누가 대전을 노잼도시라 했는가

지금 이 글을 쓰려고 '대전'을 검색하니 연관검색어로 '노잼도시'가 나온다. 뜬금없이 울산도 연관검색어다. 나는 진짜로 입력창에 대전을 때려 넣은 게 전부인데, 울산이 의문의 1패를 했다.


'대전=노잼도시' 이게 실제로도 그런지는 나에겐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2시간 정도만 차를 달리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고, 거기 있는 유명한 빵집 하나만으로도 자주 가야 하는 곳이니까.


대전이 노잼도시라는 이들의 말은 하나같이 이렇다. 일단 대전은 할 게 없단다. 명소도 먹거리도 딱히 없단다. 인천의 송도, 대구의 동성로, 전주의 한옥마을, 여수의 향일암, 부산의 광안리처럼 '어디!' 하면 방문자의 머릿속에 딱 떠오르는 핫플레이스가 없고, 춘천의 닭갈비나 대구의 막창구이나 전주의 비빔밥이나 부산의 밀면, 돼지국밥처럼 그 지역을 대표하는 먹거리도 딱히 없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그 대전 말고 다른 대전도 있나? 정부청사와 법원이 가까이 있어 출장 왔다가 근처를 지나갔던 둔산동 거리는 전국의 어느 번화가에 견주어도 모자라지 않는 곳이고, 오월드는 내가 본 최고의 테마파크이며, 유성에는 유명한 온천이 있는 것도 알고, ○심당은 아예 간첩도 알 거다. 국립중앙과학관, 대전시립미술관, 한밭수목원, 대청호, 장태산자연휴양림 등 나중에 갈 곳도 넘쳐난다. 이젠 엑스포 공원 자리에 큰 쇼핑몰도 생겼다. 대전에는 대학이 많아서 그 근처에 힙한 옷가게와 소품가게, 음식점들도 얼마든지 있다.


음식도 없는 게 아니다. 닭볶음탕 맛집, 칼국수 맛집, 두부 두루치기 맛집, 냉면 맛집 등등. 조금만 찾아보면 오래된 유명한 맛집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신탄진에는 2만 원에 쇠고기를 무제한으로 먹는 곳이 있고, 관평동에는 지금은 없어져서 개인적으로 무척 아쉬운 최고의 주꾸미집도 얼마 전까지 있었다.


"에이, 아니여~ 그런 건 딴 데도 많잖혀~" 에라이 여보쇼, 우리가 각 지역의 시그니쳐라고 알고 있는 것들 중 오직 거기에만 있는 게 몇이나 되냥? 그렇게 따지면 여수의 돌산 갓김치도, 제주의 딱새우회도 전국 어딜 가나 다 있슈~ 심지어 빛의 속도로 배달도 돼유~ 그냥 방구석에 퍼져서 휴대폰 띠또띠또 하면 집으로 날아와유~

그러면 유잼도시에서는 얼마나 대단한 것들을 하고 사나 비교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서울이면 아담한 카페에서 빵과 커피를 즐기곤 연인의 손을 잡고 서촌, 북촌, 대학로, 연남동의 감성 가득한 거리를 걷다가 맛집을 찾아가 식신모드가 되곤 배를 두드리며 전시나 공연을 보는 게 보통이다. 아예 숙소 잡고 한달살이를 한다면 또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큰 차이가 있진 않다. 여기서 큰 차이가 없다는 건 어딜 가도 그게 그거라는 게 아니라, 노잼도시든 유잼도시든 놀러 갔을 때 재미있긴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유명 작가의 북토크? 유명 가수의 콘서트? 무슨 공예 체험? 레슬링 체험? 북토크나 콘서트는 유잼도시에서도 큰맘 먹고 별러서 가는 곳이다. 공예 체험 같은 액티비티는 유잼도시에서도 축제 때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레슬링 체험은 노잼글 읽다 졸지 말라고 기습적으로 슬쩍 끼워 넣어 봤다. 다른 것들? 대전에서도 할 수 있다. 얼마든지.


그런데도 대전은 노잼도시란다. 가장 먼저 누가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말에 최후의 인장을 찍는 이들은 놀랍게도 바로 대전 사람들이다. 대전에 오래 산 사람일수록 "여기 볼 거 없어~", "먹을 거 없어~"를 입에 달고 산다. 그냥 없는 게 아니라 쥐꼬리만큼밖에 없단다(아니 쥐꼬리만 하면 됐지. 쥐꼬리가 얼마나 긴데?). 심지어 ○심당 빵도 별 거 없단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들 줄 서서 사냔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나라에서 재밌는 곳은 어딜까? 

어떤 이는 말한다. 대전이 재미가 없는 이유는 대전을 찾게 만드는 그 지역만의 개성과 역사성의 부재라고. 느닷없이 어려운 말이 갑툭튀하니 어쩐지 뜻도 알기 전부터 그럴듯하다. 하긴, 사람들을 찾아오게 만드는 역사성과 스토리텔링은 관광객 유치의 키워드긴 하다.


그런데 이 그럴듯한 말 속의 빈 곳이 허전하다. 그걸 만들어 가야 할 사람은 바로 대전 사람들이다. 대전에 역사가 없담 스토리가 없담. 남들이 노잼노잼 한다고 너도나도 덩달아 노잼노잼 하다가 그나마 있는 역사와 스토리도 범버꾸범버꾸 묻힐 판이다.


한국인들의 체감 행복도가 최하위권인 사실에, 발끝에 채이도록 천지에 널린 행복 레시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른 곳 사람들의 행복만 부러워하며 오늘도 권태, 시기, 짜증 등의 부정적 감정들을 켜켜이 적립하는 마음의 습관은 어느 정도 비중일까. 행복하려면 비교하지 말아야 된다는 둥, 그건 가까운 곳에 있는 거라는 둥, 눈을 크게 뜨고 보라는 둥, 늘 감사해야 한다는 둥, 그럼 뭐해. 쥐뿔만큼도 실천하지 않는데. 쥐꼬리 말고, 쥐뿔.


이 글은 대전의 이야기다. 아니 대전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서 있는 지금 여기에서 인형의 꿈처럼 주야장천 먼산만 바라보며 사는 나와 여러분의 이야기이다. 서울 사는 나와, 어디 사는지 모를 여러분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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