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감사 생방송. 장관이 업무보고를 한다. "존경하는 의장님, 그리고 존경하는 위원님 여러분. 작년에 지적해 주신 사항들을 바탕으로 올해는...."
업무보고가 끝나기가 무섭게 국회의원들이 십자포화처럼 맹공을 퍼붓는다. "이봐, 장관! 존경하는 위원이라 했소? 작년에 본 의원이 지적한 건 어찌 된 거요? 국회의원이 우습게 보이오? 이게 존경한다는 인간의 행동이오? 나 존경해, 안 해? 존경하면 존경한다, 다시 똑바로 말해보시오!"
재미로 각색한 얘기가 아니다. 우리나라 국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나는 이걸 생방송으로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찐따 화법을 쓰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한다니! 콜센터 직원이 "사랑합니다 고객님~♡"하면 "너 나 알아? 언제 봤다고 사랑이야?" "그럼 오늘 만날까?" 이러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 말을 폐지했다고 들었을 때는 통 믿기질 않았는데, 역시 보는 게 믿는 거구나.
어릴 땐 그게 궁금했다. "안녕하세요." 하면 늘 대답은 "안녕하세요."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늘 안녕만 하지? 어디 아플 수도 있고 근심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래서 한번은 "별로 안녕하지 못하다" 이랬다가 되게 혼난 적이 있다. 난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난 진짜로 안녕하지 못한데 어떻게 안녕하다 그래. 무조건 안녕하다고 대답하는 게 룰이면 애초에 묻긴 왜 물어?
이것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된 건 어른이 되어서이다. 말의 기능은 내가 생각보다 훨씬 다양하다는 걸 알게 될 무렵부터.
"언제 밥 한번 같이 먹자"
한동안 이럴 때 "언제로 할까요?"라고 되물었다. 돌아오는 건 상대의 난처한 표정. 상대는 늘 시간이 없는데 그중에 나와의 약속은 없군. 누군가와 약속을 하고 만난다는 건 시간이 있어서 만나는 게 아니라 없는 시간을 내서 만나는 건데 상대는 나에게 그렇게까지 할 의사는 없단 거고. 그건 내가 그 사람에게 우선순위가 그렇게 높지 않단 거고. 내가 너무 눈치 없이 군다는 걸 알곤 "그래요, 나중에 연락드릴게요."로 대답이 바뀌었다. 그는 '언제', 나는 '나중에'. 장구한 세월에 걸쳐 찾아낸 절묘한 호응관계이다.
만화 <마음의 소리>에는 이런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이 나온다. "우리가 언제 목성에 갈 수 있을까?(언제 한번 밥 먹자고 말을 건넨 사람)" "이건 왼손이야.(그러자고 손을 들어 화답한 사람)" 조 석 작가님은 이 말의 실현 가능성이 없으니 아무 뜻도 담겨 있지 않다고 보시는 듯하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그 말 뒤의 진심마저 깡그리 부정할 수 있을까? 그는 정말 나중에 밥 한번 먹고 싶었던 건 아닐까? 다만 '언제'를 특별히 말하지 않았고 자신도 모를 뿐. 그럼 언제 먹나? 난 알지. 언젠가는.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할 때 그 언젠가는. 단 지금은 말고.
'지금 아님'에 주목하면 '너랑은 안 먹어'에 가깝지만, '언젠가는'에 주목하면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최소한 너랑 밥을 먹을 때까지는 우리의 관계는 끝난 게 아냐'에 가깝다. 그러니까 이건 실행 시점을 기약 없이 멀리 잡아 놓음으로써 상대와의 관계를 데면데면하게나마 계속 이어 나가겠다는 의사의 표명이기도 하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우니 빈말이라고 비난할 것도 없고, 거북이처럼 목을 빼고 연락을 기다릴 것도 없다. 밥을 먹자는 그 사람의 의사가 강하고 구체적이었다면 "언제 밥 한번 먹자고요"가 아니라 “오랫동안 적조했네요. 약속 없는 날짜 몇 개 주시겠어요? 제가 맞춰 볼게요. 아, 좋아하는 식당 있으세요? 제가 예약할게요.” 정도 됐겠지만, 진짜로 그랬다면 정작 내 쪽에서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말과 글에 서투르다곤 하지만 나도 한국사람인데 우리말의 '밥'에 담긴 중층적 의미를 모를까. "아침밥 드셨습니까?"에 "안 먹었으면 사주기라도 할 건가?" "밥 말고 빵이나 라면 먹으면 안 되나?"라고 하지 않는 건 밥이 친교의 언어로서 하는 역할이 상당함을 아니까. 오랫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는 자식에게 한국의 어머니가 말하는 "아침밥은 꼭 챙겨 먹어라"에는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온갖 걱정이 들어 있다. 여기다 "저는 아침밥이 체질상 안 맞아요." 이러는 찐따가 어디 있냐고(아니, 어쩌면 있을 수도 있겠다. 내가 "날씨 참 좋지?" 하니까 "보면 모르냐?" 이러는 사람도 봤으니).
다들 나처럼 생각하는 건 아닐 테니 자칫 공수표나 남발하는 사람이 될까 두려워서 난 이 말을 쓰지 않고 살지만, 그래도 약간의 자비를 호소하고 싶다.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도 그런 맥락으로 볼 수는 없는 걸까요?"라고. 매일 만나도 공허한 관계가 있고 가끔 만나도 돌아서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관계가 있는데 일 년에 한 번 아니 몇 년에 한 번이라도 기쁘게 볼 수 있는 관계라면 가끔씩 오래 보고 싶으니까. 관계 속에서 지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건 어쩌면 그런 다정한 무관심일지도 모르니까.
여러 기사에서 한국인이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이 "밥 한번 먹자"라고 한다. 뭔가 약속의 의미가 담겨 있다면 그야말로 거짓말이 되겠지만 언어에 꼭 그런 기능만 있는 건 아닌데. 아무리 신용 사회라도 모든 언어가 그렇게 다 약속이 되어 버리면 세상 숨막혀서 어찌 살까.
누군가 내게 언제 밥 한번 먹자고 하면 '지키지도 못할 말을 내뱉다니, 신뢰 못할 인간이잖아?' 이러기보다는 그냥 씽긋 웃어주고 싶다. 지키지 못할 말이어도 괜찮으니까. 그리고 위 신문기사를 쓰신 기자님들께 죄송한 말씀이 될지 모르지만, 세 분께는 이 문제를 조심스레 드려 보고 싶다.
문) 다음 두 사람의 대화에서 드러나는 언어의 기능은?
"언제 밥 한번 먹자."
"그래요,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① 친교적 기능 ② 명령적 기능
③ 미적 기능 ④ 정서적 기능
그 왜, 있잖아? 결혼식 주례사에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잔인한 저주 같지만 이건 사실 죽음마저도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순 없다는 말이다. 여기 죽음은 둘이 함께 가는 길에 있는 하나의 관문일 뿐. 하니야,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곧 만나. 그러니까 '언제 밥 한번 먹자'의 <언제>와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의 <죽음>은 많이 닮았다. 특정되지 않은 시기를 정함으로써 영원을 희구한다는 점에서.
그래서 그 언제가 언제냐고? 영영 그날이 안 오면 어쩔 거냐고? 응 그럼 나중에 귀신끼리 한 숟갈 뜨면 되지. 아니 이놈이 누굴 놀려? 귀신끼리 뭐가 어쩌고 어째? 아니 도대체 왜들 그래. 이거 맛있어, 이거 먹어 봐. 다정하게 한 숟갈 떠서 너 한 입, 나 한 입... 꽤 훌륭한데? 이게 뭐가 어때서? 그럼 그때 가서 머리끄덩이 붙잡고 귀신 배틀이라도 한판 뜰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