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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Jan 14. 2023

사무라이 정신의 종말

내겐

그다지 좋지 않은 버릇 하나가 있다


남이 뭔가 적극적으로 청하지 않는 한

내 쪽에서 먼저 모르는 사람에게

선의를 베풀지 않는 것


가령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내릴 곳이 가까워지면

벨을 누르고 뒷문 근처로 가야 하는데


손가락 까딱 않고 따라 내리는 사람이

무척 얄밉게 느껴져서

내가 못 내리면 못 내렸지

절대로 모르는 사람을 위해 벨을 눌러 줄 수 없다


이렇게 되니

버스 운전하시는 분이

아무도 내릴 사람이 없는 곳이라 생각하고

내가 내릴 곳을 그냥 지나쳐 버렸던 적이

여러 번 있다


어떨 땐 막차를 타고 가다 그 꼴이 났는데

다음 정류장이 한강 건너편에 있어서

야밤에 한강다리를 털레털레 건너온 적도 있다




그날도

버스를 탔다

내가 내리는 곳은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고

항상 누군가는 내리고 타는 곳이라

버스가 서지 않고 그냥 지나칠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그날은

버스가 정류장에 서려고

점점 속도를 늦추고 있었는데도

버스 안의 그 누구도 꼼틀거리지 않고 있었다


누를까

아냐


배가본드야

명예에 죽고 명예에 사는

사무라이 정신을 잊었느냐

차라리 할복을 할지언정 그건 아니지


운전하시는 기사님이

버스의 앞문만 열고

뒷문을 안 열어 주실까봐

버스가 멈춰 섬과 동시에

마치 마이클 조던의 극적 버저비터처럼

벨을 누르고 총알 같은 속도로

뒷문을 향해 돌진해서

간신히 내릴 수 있었다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릴 곳을 지나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무라이의 명예를 사수할 수 있어서


그런데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서로가 일행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무려 두 명의 중년 여성과

한 명의 중년 남성이

내 뒤를 따라 헐레벌떡 내리면서

휘유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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